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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Oct 16. 2019

운수 좋은 날

돌아보니 조커였다. 창백한 얼굴 위로 입꼬리를 빨갛게 늘린.


다시 보니 아내다. 입가에 빨갛게 핏줄이 섰다.


아내는 대관절 왜 조커가 됐는가? 힘드니까. 뭐가? 종일 혼자서 아이를 보는 게. 종일 집에 있는 남편은 뭐하고? 남편이 나쁜 놈이네.


말 함부로 하지 마시라. 요즘 나는 일에 집중하겠다는 핑계로 종일 서재에 틀어박혀 있을 뿐이니까.


하지만 조커가 된 아내를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어서 좀 들어가서 쉬라고 했다. 아내는 사양하지 않고 들어가서 바로 곯아떨어졌는지 기척조차 들리지 않는다.


아들과 좀 놀아줬다. 30분쯤 지나니까 지겨운 기색이다. 나는 이미 10분쯤부터 지겨웠다. 그래도 30분을 더 버텨서 1시간을 꽉 채웠다.


그 정도 놀았으면 좀 잤으면 좋겠는데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아 데리고 산책을 나섰다.


이제 10개월밖에 안 된 녀석이 벌써 머리 좀 굵어졌다고 가던 데 또 가면 금방 싫증을 낸다. 별수 있나. 차에 태워서 아들이 한 번도 안 가본 동네로 향했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테이크아웃했다. 애 볼 때는 나도 뭐라도 얻는 게 있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힘이 나지.


한 모금 여유 있게 빨아 당겼다. 퉤, 누가 한약을 따라놨어. 무슨 원두로 할 거냐길래 내가 뭘 아나, 그냥 연한 거로 달라고 했더니 제일 덜 신 거로 준다고 한 게 그거다. 신 건 둘째치고 쓰기까지 하다. 제일 신 거 받았으면 사약이라도 내린 줄 알았겠네.


하지만 커피는 주 목표가 아니었다. 나는 아이를 산책시키는 대가로 나 자신에게 떡볶이나 핫도그나 소떡소떡이나 핫바를 하사할 계획이었다. 그냥 먹으면 운동도 안 하면서 처먹긴 드럽게 처먹네, 라고 자괴감이 들지만 애 데리고 돌아다녔으면 그 정도 먹을 자격이 된다는 게 내 나름의 기준이다.


나는 먹고 싶은 거 죄책감 없이 먹어서 좋고 애는 그 덕에 산책해서 좋고, 그야말로 애비 좋고 아들 좋은 일이다. 그래서 나는 분식집을 찾아 동네를 샅샅이 뒤졌다.


근데 뭐 이딴 동네가 다 있어. 분식집이 코빼기도 안 보인다! 아니, 이 동네 사람들은 떡볶이도 안 먹고 사나? 내가 이러려고 애 데리고 나왔나 자괴감 들고 괴로웠다.


다시 차로 돌아왔는데 이대로 집에 돌아가긴 억울했다. 마침 옆에 중형 마트가 있어서 들어갔다. 바로 즉석 음식 코너로 직진! 진짜 안 되는 놈은 앞지퍼만 열어도 똥을 지린다고 다른 지점에는 다 있는 코너가 그 지점에만 없었다.


조커가 왜 조커가 됐나. (영화 조커의 약스포가 있습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세상이 날 몰라주고 힘들게 하잖아. 내 심정이 딱 그랬다. 좋은 남편, 좋은 아빠 되려고 애 들쳐 매고 일부러 남의 동네로 산책까지 나왔건만 내가 뭐 큰 걸 바란 것도 아니고 핫도그 하나 먹잖건데…….


뭐라도 군것질거리를 찾아야 했다. 마트를 싹 다 뒤졌는데 통 마음에 드는 게 없어 한 바퀴 더 돌았다. 어라? 프링글스 볼로네제맛? 처음 보는 맛인데 30프로 할인까지 하네?


아내가 맨날 하는 말이 제발 먹는 거 새로 나왔다고 무조건 사 먹지 말란 거다. 하도 실패를 많이 해서 그렇다. 하지만 프링글스는 지금까지 나를 실망시킨 적 없고 할인까지 하는데 이 기회를 어떻게 놓쳐.


그래서 아쉬운 대로 프링글스 볼로네제맛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아이도 졸려하길래 바로 재우고 서재에 들어가 떨리는 손으로 프링글스의 뚜껑을 열고 은박지를 땄다. 그리고 대망의 한 입.


퉤, 벌집핏자잖아!


벌집핏자가 나쁘단 게 아니다. 내 취향은 아니다. 설마 프링글스에서 그 맛이 날 줄은 몰랐다.


안 되는 놈은 프링글스를 사도 벌집핏자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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