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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Oct 31. 2019

싫은뎅? 밤에 쓸 건뎅?

밤에 쓴 편지를 바로 부치지 마세요.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보면 박박 찢어버리고 싶을 테니까.

흔한 조언이다. 밤에는 감성이 마구 끓어올라 이성을 구워삶아 버리니까 나중에 읽으면 머리를 프라이팬으로 한 대 갈기고 싶은 글이 나온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비단 편지만 아니라 타인에게 공개하는 글도 밤에 쓰진 말 일이다.


밤에 감성이 우세해지는 건 사실이다. 밤에 어떤 마력이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저 하루를 사느라 지친 정신이 더는 이성의 끈을 잡을 기운이 없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밤이면 사람은 대체로 마음이 머리꼭대기에 앉은 상태가 된다.


그럴 때 쓴 글은 아침에 기운을 차린 머리가 보면, 그래, 논리도 없고 낯 뜨거운 표현이 개똥처럼 깔린 글일 수 있다. 체면이 깎이는 글일 수 있다. 그래서 머리는 간밤에 목줄 풀린 마음이 싸지른 말을 고이 접어서 버릴레라.


그런데 그렇게 청소당한 글은 더 이상 개성 있는 글이 아닐 것 같다. 머리가 흔한 논리와 통념에 맞춰 여 썰고 저 썰어버린, 표준화된 글에 지나지 않는다. 무난한 글, 밋밋하고 심심한 글이다.


작가의 개성이란 종일 이성의 감옥에 갇혀 있던 감성이 야음을 틈타 종이 위에서든 화면 위에서든 요란한 글판을 벌일 때 비로소 살아나는 것 아닐까 싶다. 적어도 종일 생각 있는 척, 진정성 있는 척, 배려하는 척하느라 대가리 굴리며 사는 나는 그렇다. 저녁에라도 마음을 좀 풀어줄 필요가 있다.


뜬금없는 얘기지만 며칠 전에 갈비탕을 끓였다. 두세 시간마다 물을 갈면서 하루 동안 핏물을 뺀 소고기를 1시간 넘게 푹 끓였더니 내가 만들었지만 구수한 국물 맛이 기가 맥혔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냄비를 여니까 국물 위에 기름이 허옇게 굳어 있었다. 몸에도 좋지 않은 거 먹어서 뭐하냐고 다 걷어냈다. 그러고서 점심때 다시 끓여 먹었는데 맹탕도 그런 맹탕이 없었다. 언 놈이 진짜 국물은 다 훔쳐먹고 물을 부어놓은 것 같은 맛이었다.


그때 알았다. 갈비탕의 맛은 국물 위에 둥둥 뜬 기름에서 나온다는 걸. 그것도 모르고 액기스를 다 덜어내 버리다니.


글도 갈비탕이나 마찬가지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성의 눈에 거슬리는 기름기를 다 걷어내 버리면 맛이 하나도 없는 맹탕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이제 마음을 굳혔다. 써도 밤에 쓰고 고쳐도 밤에 고치겠다고.




어휴, 그 새끼, 밤에 지 꼴리는 대로 쓰겠다는 소릴 졸라 길게도 늘어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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