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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Nov 09. 2019

돈은 써야 제맛

혹시 우리가 팔고 나서 집값 더 오르면 어쩌지?

아내의 말씀이다. 아내는 짠순이다. 돈을 쓰는 것보다 모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아내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거지 꼴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나는 돈 생기면 일단 쓸 궁리부터 한다.


대전에서 살던 집이 딱 팔아야 하는 시점에 가격이 올랐다. 근 5년간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던 집값이 갑자기 뛰었다. 근처에 쇼핑몰이 들어서기로 해서라고도 하고 투자자들이 몰려와서라도고 하는데 이유야 어쨌든 우리야 고맙지.


가격을 제법 세게 불렀는데도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결국엔 팔렸다. 아들의 태명을 억은 물고 태어나라고 억돌이로 지은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 집 팔아서 억을 벌었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로서는 횡재였다.


계약하러 가는 날 우리 부부와 억돌이와 장모님까지 네 식구가 총출동했다. 아내가 우리 집 팔러 멀리 가야 하니까 애 좀 봐달라고 장모님에게 SOS를 쳤고, 장모님은 애가 엄마 없으면 너무 울어서 혼자 보기 힘들다고 SOS를 치셨다. 그래서 다 함께 왕복 5시간 거리를 오갔다.


아내는 집을 팔기로 한 때부터 팔고 나서 집값이 오르면 어쩌나 걱정이었다. 대전에 도착해서도 그러는 것을 장모님이 듣고는 한마디 하셨는데 그 말씀이 걸작이다.


사는 사람도 좀 남겨야지.

듣고 보니 그렇다. 내가 남겨 먹고 판 아파트, 산 사람도 남겨 먹고 팔면 윈윈 아닌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랬다. 우리는 인감도장이 스친 사인데 그 사람도 나중에 이득 보면 좋지, 뭐. 내가 직접적으로 뭘 해주는 건 아니지만 내 집에 전세 살던 사람이 기왕이면 잘돼서 나가는 게 좋은 거와 같은 마음이다.


그렇다고 내가 부동산 투기나 집값이 한없이 우상향하는 것을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보유세를 세게 때리든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집값 올리는 투자자들 죽빵을 때리든 해서 사람 사는 집 갖고 장난 못 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집값 오르는 건 좋다. 내 집 있는 곳에 투자자들 몰려오는 건 환영이다. 단, 내 집 팔 시점이 됐을 때만. 내가 이기적이란 건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내년에 이사 가려고 눈독 들이던 아파트는 분양권 프리미엄이 그 사이에 확 올랐다. 진작 샀어야 했는데 못 산 건 나의 우유부단함과 아내의 짠순이 기질이 합쳐진 결과다. 더 좋은 조건 찾다가 결국 못 샀다. 왜 올랐는가 알아보니 투자자들이 들어오고 있다는 말이 들린다. 내가 팔 집만 올려야지, 살 집까지 올리면 어떡해, 이 양반들아.


매도 계약 하고 온 당일이었던가 며칠 후였던가 저녁에 거실에 자빠져 있다가 부엌에 있는 장모님에게 물었다.


“장모님, 세탁기 새로 하나 놔 드릴까요?”


장모님은 빙긋 웃는데 아내가 한마디 한다.


저 봐, 돈 들어오니까 또 쓸 생각부터 한다니까.

내가 우리 엄마 사준댔냐, 니네 엄마 사준댔지. 있는 사람들이 돈을 써야 나라 경제가 좋아지지. (우리가 있는 사람들인진 모르겠지만) 돈은 쓰는 게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요, 나를 사랑하는 길이다.


장모님은 세탁기 놔 드리고 우리 엄마는 그만큼 용돈 드렸다. 동생네와 처제에게도 약소하나마 필요할 때 쓰라고 얼마 건넸다. 더 많이 주고 싶었는데 아내가 내 동생은 처자식 있으니까 많이 줘도 되는데 지 동생은 혼자니까 많이 못 준다고 해서, 야, 니 동생이랑 내 동생이랑 똑같이 줘야지, 어떻게 내 동생만 많이 주냐, 씨름하다가 둘 다 조금씩밖에(내 기준) 못 줬다. 얘는 하여튼 친정에 돈 쓰는 건 일단 후려치고 본다.


그래서 집 판 돈으로 나를 위해서는 무엇을 했느냐 묻는다면 양심에 손을 얹고 말하는데 여지껏 나한테 쓴 돈은 한 푼도 없다. 월 15만 원인 용돈도 단돈 10원도 안 올렸다. 아내로 말하자면 3년을 쓰고도 앞으로 1년은 더 쓴다고 호기롭게 말하던 아이폰SE를 마침 집 판 후에 떨궈서 개박살을 냈다. 테이프 붙여서 쓰겠다는 걸 제발 좀 바꾸라고 해서 아이폰XR 중고로 바꿨다.


나는 그때까지도 폰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아내한테 오염돼서 역시 3년 쓴 아이폰7플러스를 아직 1년은 더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아내 폰으로 찍은 사진 보니까 3년이란 세월 동안 일어난 기술의 발달이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때마침 아이폰11까지 출시됐다. 딥퓨전이니 나이트모드니 해서 어두운 곳에서도 사진이 잘 나오게 해준댄다. 안 그래도 집에서 아이 사진 찍으면 자글자글해서 불만이었는데 딱 내게 필요한 기능이다.


이렇게 된 이상 아이폰11로 간다. 대신 제일 싼 64기가로.


이것은 어디까지나 아이를 위한 결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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