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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Dec 12. 2019

의인은 너희에게 실망했다

의인은 뒷베란다의 재활용 쓰레기 수거함이 가득 차서 넘치는 것을 보다 못해 수거함을 모두 들고 집 밖으로 나섰다. 엊그제 열이 39도까지 올랐고 아직 완전히 회복되기 전이었지만 가족의 쾌적한 삶을 위해 자기 한 몸 희생하기로 했다.


트레이닝복, 아니, 그 느낌이 아니지, 추리닝에 잠바 하나 걸치고 발에는 어제 신고 구석에 처박아둔 양말을 꺼내 신고 쓰레빠를 질질 끌면서 1층 쓰레기장으로 향했다.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섰을 때 눈앞에 불의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열 살쯤 되는 여자애가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가고, 아이를 쫓아가는 포메라니안이 거의 발꿈치에 붙어서 달리는 것 같았다. 포메의 목줄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주인 잃은 손잡이가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그 뒤로 포메의 주인으로 보이는 아줌마가 달려오며 “네가 뛰니까 더 쫓아가는 거야!”라고 외치고 있었다.


의인은 생각했다. 아니, 그럼 개가 딱 달라붙어서 달려오는데 멈추라고요?


아니, 의인은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할 겨를 없이 몸부터 나갔다. 아이와 포메 사이로 뛰어들어 포메를 막아섰다. 그리고 “웍! 웍! 킁!” 하고 위협적인 개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쓰레빠로 현란한 스텝을 밟으며 개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아무리 의인이지만 솔직히 개한테 물릴까 무서웠다. 하지만 이젠 개의 표적이 완전히 자신으로 바뀌었으니 뒤돌아서 달아나 봤자 아까 그 아이와 똑같은 광경만 연출할 뿐이었다.


개는 의인의 개소리 때문인지 스텝 때문인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다리를 뗐다가 거두기만 반복했다.


얼마나 대치했을까. 주인아줌마가 달려와서 포메를 끌어안고 냅다 달아나버렸다.


아이는 이미 가고 없고 아줌마는 고맙다느니 미안하다느니 인사도 없이 휑하니 사라져 버렸다.


의인은 참 시시한 결말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수거함을 들고 쓰레빠를 질질 끌며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나 오늘 애 하나 구했어”라고 말했다. 하지만 며칠째 장염으로 고생 중인 아내는 컨디션이 컨디션인지라 반응이 영 뜨뜻미지근했다.


의인은 실망했다. 내가 오늘 무려 세 생명을 구했거늘. 아이가 물렸으면 그 트라우마는 어쩔 뻔했으며, 개는 안락사당하고, 아줌마는 사랑하는 반려견을 잃고 동네에서도 쫓겨났을 것이다. 오늘 내 덕에, 아니, 의인 덕에 그 셋은 십년감수한 줄 알아야 한다.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욕실에 들어갔다. 거울 속에는 아파서 며칠째 안 깎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있고, 얼굴은 기름밭이요, 머리는 떡진 까치집인 남자가 서 있었다. 의인은 생각했다.


아, 드러워서 피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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