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감히 배우들에게 동질감을 느낀다니, 잘생겼다는 말을 우리 엄마한테서, 그리고 어거지로 아내한테서 들어본 것 외에는 들어본 기억이 없다시피 한 내가 감히 어떻게? 사람이 외모가 다가 아니지. 살아온 길을 봐야지. 그 오랜 무명의 길.
지금은 내로라하는 많은 배우가 처음부터 대스타로 각광받지는 않았다. 누구는 연극판에서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푼돈밖에 안 되는 보수를 받으며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누구는 영화판에서 단역 하나에도 감지덕지하며 수십 번, 수백 번 오디션을 보다가 짧게는 수년, 길게는 십수 년 만에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나도 그들처럼 번역판을 구르고 있다. 올해로 10년째 이름 없는 번역가다. 어제는 작년에 내가 매일 몇 장을 번역했고 매월 얼마를 벌었는지 기록해 둔 파일을 열어봤다. 보니까 아내가 돈을 벌지 않으면 그냥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이런저런 피치 못할 사정으로 번역을 못 하는 날이 있었기로서니(게으름을 피운 날도 좀 있었지만) 1년 소득이란 게 흉년이 든 보리밭처럼 초라하기 짝이 없어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몇 년 전에 일은 끊기고 샘플은 보내는 족족 떨어지니 과연 내가 이 일로 계속 먹고살 수 있을까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이쯤에서 그만둬야 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배운 게 번역질이라고 번역 말고는 딱히 할 줄 아는 게 없어 막막했다. 이 일을 시작하고 그렇게 참담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때 내게 기운을 준 사람이 배우 류승수였다. 아, 그렇다고 직접 만나거나 했다는 말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텔레비전에서. 당시 류승수가 <라디오스타>에 나와서 그랬다.
영화 <고지전>을 촬영할 때 자신이 정말로 죽을 똥 살 똥 준비하고 심혈을 기울여 찍은 장면이 있었다고. 자신의 연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영화가 개봉하면 분명히 그 장면이 화제가 될 거라 기대했다고. 그런데 막상 완성본을 보자 그 장면이 통째로 잘려나가서 참담한 심정이었다고. 그래서 몇 날 며칠을 술에 빠져 살았다던가 아니었던가 그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여하튼 중요한 건 그때 그에게 동료 배우 차태현이 해준 말이었다.
정확히 무슨 말이었는지는 역시나 기억나지 않지만 여하튼 요지는 형, 너무 낙담하지 마라, 아직 형의 때가 안 온 것뿐이다, 언젠가는 그때가 반드시 올 거니까 계속해보자, 라는 거였다.
어찌 보면 참 뻔한 말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는 저 말이 류승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게도 큰 힘이 됐다. 류승수가 그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는 이미 드라마 홍보를 위해 나올 만큼 인지도 있는 배우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시절의 고민을 과거의 일로 추억할 수 있는 위치에 섰기 때문에, 말하자면 차태현의 말이 이뤄진 것이었기 때문에 내게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그래, 일단 10년까지는 버텨보자, 라고 다짐했다.
내가 2008년 1월에 첫 의뢰를 받았으니 이제 번역한 지 꼬박 10년이 지났다. 아직까지는 가시적인 변화가 없다. 여전히 벌이는 그저 그렇고 독자는커녕 편집자들도 나를 잘 모른다.
주식 투자에서는 손절이 중요하다고 한다. 안 될 것 같으면 손해를 좀 보더라도 더 큰 손해를 보기 전에 팔아치워야 한단 것이다. 하지만 좋게 말하면 뚝심 있는, 나쁘게 말하면 미련한 자들은 손절 대신 존버를 한다. 존나게 버틴다는 거다. 존버하다보면 다시 주가가 살아나기도 하고 아예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기도 한다. 그건 노력보다는 시장의 흐름이라면 흐름, 운이라면 운에 달린 일이다.
번역에 10년을 꼬라박은 나는 지금 손절을 고민해야 할까, 아니면 존버에 매진해야 할까. 혹시 이게 내 노력보다 운에 더 크게 좌우되는 거라면?
손절은 개뿔. 운명의 여신님아, 10년 받고 5년 더. 쫄리면 뒈지시…… 아차차, 여신님에게 할 말은 아니지. 여하튼 갈 데까지 가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