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말하는 필사는 흔히 생각하는, 죽을힘을 다해 싸우는 치열함을 뜻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 과연 필사적이라고 할 만한 순간이 있었는가 싶다. 나는 필사보다 빈둥빈둥이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 안 될 것 같으면 빨리 포기하고, 될 것 같아도 굳이 안 해도 되면 안 하는, 치열할 것 없는 인생. 자랑도 아니지만 딱히 부끄러울 것도…….
여기서 말하는 필사는 남의 글을 베껴 쓰는 필사다. 요즘 서점에 가보면, 나야 방구석에서 주로 온라인 서점을 둘러보지만, 시중에 필사에 대한 책이 적잖게 나와 있다. 대부분 필사를 통해 필력을 키워보자는 게 요점이다. 내가 하는 필사의 목적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왜 필사를 하느냐? 그 이유를 말하자면 내가 예전에 연극 동호회에 들락거리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야겠다. 어느 날 연출가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OO씨는 자판기야. 누르면 바로 연기가 튀어나오잖아."
칭찬이냐고? 전혀! 말인즉 연기를 하려면 일단 감정부터 잡아야 하는데 나는 "시작!"하면 그런 것 없이 바로 대사부터 치니까 연기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필사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번역에 들어가기 전에 감정을 잡기 위해서, 다시 말해 내가 번역하는 책에 어울리는 표현법을 내 글쓰기 감각에 심어 놓기 위해서다.
당연한 말이지만 책마다, 작가마다 문체가 다르고 분위기가 다르다. 번역가는 그런 특징을 잘 살려 내야 한다. 자신이 평소에 쓰는 표현법에 매몰되지 않고 원작의 감성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저자의 알곡에 역자의 개성 혹은 몰개성을 씌운 번역서가 탄생한다. 물론 번역가가 문체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카멜레온은 아니니까 그의 색깔이 역서에 묻어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최소한 카멜레온 흉내라도 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매일 번역을 하기 전에 내가 번역하는 책과 성격이 비슷한 국내 작가의 책을 베껴 쓴다. 예를 들어 트렌드에 관한 책을 번역하고 있는 요즘은 ⟪2018 대한민국 트렌드⟫를 필사하고 있다. 시간은 하루에 5~10분 정도. 굳이 문장을 분석하거나 통째로 외우려 하지 않고 한 번에 기억할 수 있는 만큼 토막 내서 읽고 옮겨 쓰는 식이다. 손으로 쓰는 것은 귀찮아서 그냥 타이핑을 한다. 오타가 나면 오타가 나는 대로 두고 토씨가 틀리면 틀리는 대로 둔다. 가끔은 그냥 자판을 영어로 맞춰 놓고 치기도 한다. 어차피 어디 갖다 팔아먹을 것도 아니고 그냥 남의 문장을 읽고 써보는 데 의의가 있을 뿐이니까 마구잡이로 타이핑을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요컨대 전혀 필사적이지 않은 필사다.
내가 이 필사적 번역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 작품은 ⟪OO비O들⟫이라는 소설이었다. 이전에 종교 소설, 소설의 탈을 쓴 자기계발서, 고전 소설을 번역해본 적은 있었지만 본격 대중 소설을 맡기는 처음이었다. 더욱이 이 책은 여성 작가가 20대 말~30대 초반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쓴 칙릿으로, 남자인 내가 평소에 쓰는 문체, 평소에 읽는 작품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소설의 맛을 잘 살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생각해낸 방법이 국내 칙릿의 고전이라면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를 필사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지만 막상 필사를 해보니 '오, 이런 표현도 가능하네', '음, 소설가들도 이런 문장을 쓰는군' 하면서 새로운 것을 습득하고 평소에 내가 쓸까 말까 고민했던 표현에 대한 확신을 얻는 등 유익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래서 정말로 필사를 통해 원작의 분위기를 살릴 수 있을 만큼 감정이 잡히는가, 하는 문제다. 물론 이건 문체 분석기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 한 계량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다만 번역서가 출간된 후 독자들의 반응을 보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반응이 어땠는가 하면…… 내 입으로 말하기 좀 그렇지만 번역을 칭찬하는 독자가 많았다. 찰진 대사가 입에 쫙쫙 붙는다는 평부터 국내 작가가 쓴 소설처럼 읽힌다는 극찬까지 호평 일색이었다.
그다음으로 번역한 ⟪OOOO의 OO한 OO 사건⟫은 스페인의 여성 작가가 쓴 소설이었는데 필력이 아닌 입담으로 썼다고 해도 좋을 만큼 마치 변사가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처럼 맛깔난 서술법이 일품이었다. 국내 작가 중에 그런 이를 꼽으라면 단연 천명관이었다. 비록 여자와 남자라는 차이가 있다고는 해도 입담이 좋다는 공통점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나의 삼촌 브루스 리⟫를 필사했다. 그렇게 나온 이 책은 앞의 역서와 달리 판매량이 많지 않아 독자들의 평도 잘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얼마 안 되는 서평 중에 마치 천명관의 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는 후기가 있었다. 내가 남의 문체를 빼다박을 정도의 모사력이 있는 게 아니라면(그것도 괜찮겠지만) 그만큼 책의 분위기를 잘 살린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이후로도 몇 권의 역서가 나왔으나 번역에 대한 호평도 혹평도 없었다. 자기계발서와 경영서들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런 책들도 물론 저자가 고심해서 쓴 문장들로 이뤄져 있지만 소설과 달리 대체로 평이하게 쓰여 있어서 번역가의 필력이 드러날 여지가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확실히 증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필사가 번역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차피 하루에 기껏해야 5~10분 투자하는 건데 내가 하루살이도 아니고 그 정도는 설령 낭비된다고 해도 하루의 살이에 미미한 타격조차 안 된다고 본다. 그래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필사를 한다.
더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 고민하는 번역가라면 필사를 한번 해보시길.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단 하나의 원칙만 지키면 된다. 필사적으로 하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