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하이라이트 Nov 25. 2019

오늘을 버티기 위해 나와 내 일의 가치를 되새깁니다

젊은 번역가의 공부 습관 (20)

<젊은 번역가의 공부 습관>이 새로운 제목으로 2020년 4월 11일 출간될 예정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해보고 싶습니다> 텀블벅 펀딩 바로 가기




“고명 씨, 솔직히 이 일 권하고 싶지 않아. 이거 돈도 명예도 안 따르는 일이야. 나중에 결혼 못 할 수도 있어.”


제가 2007년에 번역을 배울 때 한 선생님께 들은 말씀입니다. 그때 제 나이가 스물여섯이었어요. 아직 대학교 졸업반이었으니까 다른 길로 가려면 갈 수 있는 시기였죠. 그래서 다시 생각해보길 바라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번역을 택했습니다. 나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왜 다들 그렇지 않나요, 전쟁터에 나가도 왠지 나는 살아남을 것 같잖아요. 그런 근거 없는 믿음으로 겁없이 번역 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결혼은 했습니다. 다만 돈이나 명예는 따르지 않았어요.


일단 돈 얘기를 해볼게요. 아마 다들 번역가의 수입이 궁금하실 거예요. 제가 통계 자료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니까 어디까지나 제 경험에 비춰서 말해보겠습니다.


번역료를 원고지 1장에 4,000원으로 잡고, 하루에 번역 원고 50장을 생산하며 한 달에 20일을 일한다고 해보죠. 그러면 번역료로 버는 돈이 월 400만 원입니다.


물론 실수령액은 아니에요. 여기서 세금(3.3퍼센트=약 13만 원) 떼고 통장에 입금되거든요. 그리고 매달 날짜 맞춰서 국민연금(9퍼센트=36만 원)과 건강보험료(재산에 따라 달라지는데 여기서는 편의상 20만 원이라고 하죠)가 나갑니다. 직장인은 회사에서 절반을 보조해주지만 프리랜서는 직장이 없으니까 당연히 전액 자부담입니다. 그러면 실수령액이 331만 원쯤 되네요.


벌이가 나쁘지 않죠?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함정이 있습니다.


첫째, 장당 4,000원이란 번역료가 업계 최고 수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쉽게 받을 수 있는 금액은 아니에요. 저는 꼬박 10년을 일했을 때 번역료가 4,000원 대에 진입했습니다. 그 후로 제게 번역을 의뢰하려다가 번역료를 듣고 비싸서 안 되겠다고 하는 출판사가 종종 있었어요. 출판사에 따라 부담스러울 수 있는 금액이란 거죠.


둘째, 매일 원고지 50장 분량을 번역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는 지금도 번역이 까다로운 책은 하루에 30장 겨우 넘기기도 해요.


셋째, 한 달에 꼬박 20일을 번역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어요. 프리랜서라는 특성상 일이 끊길 때가 있거든요. 일하고 싶어도 할 일이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거죠. 저는 일 없어서 쉰 날을 다 합치면 연 평균 1달 정도는 됐던 것 같습니다.


넷째, 직장인과 달리 고용보험에 가입되지 않고 퇴직금이 적립되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일 안 들어오면 어디서 들어오는 돈이 없어요. 스스로 비상시를 대비해 목돈을 모아야 합니다.


번역만 해서 먹고살 수 있냐고요? 통계청 2018년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1인 가구의 월평균 소비 지출은 142만 원, 2인 가구 220만 원, 4인 가구 382만 원입니다. 번역가의 소득에 대한 통계 자료는 없지만 제가 볼 때 외벌이 번역이 유일한 소득원이라고 할 경우, 혼자 살면 살 만하고, 둘이 살면 빠듯하지만 어찌저찌 견딜 만하고, 넷이 살면 삶이 팍팍할 거예요. 저요? 바깥양반(=아내)이 저보다 잘 벌어서 살 만합니다.


그럼 돈 얘기는 이 정도 하고 명예로 넘어가죠. 명예, 간단히 말해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겁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당장 이름 댈 수 있는 번역가가 몇 명이나 되나요? 아마 손에 꼽을 걸요. 네, 그래요. 번역가는 어지간해서는 누가 특별히 기억해주지 않아요. 작가의 그림자 같은 존재죠.


몇 년 전만 해도 포털에 “김고명”이라고 넣으면 농담이 아니라 칼국수, 떡국 레시피만 잔뜩 나왔어요. 아무리 제가 역자 프로필에 “음식에 얹는 고명처럼 원문의 멋과 맛을 살리고 싶은 번역가”라고 쓴다지만, 세상에, 경쟁할 게 없어서 칼국수랑 경쟁이라니요.


그나마 이제는 경력이 10년이 넘었으니까 제 역서들이 검색 결과에서 상위권에 나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저는 독자들에게 무명 번역가예요. 10년을 번역해서 칼국수를 이긴 게 가장 눈부신 업적이라고 할 판에 명예가 웬 말입니까. 후우, 여기까지 하죠.




보다시피 선생님의 말씀 대로였어요. 제가 번역가로 걸어온 길에는 돈도, 명예도  따르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저는 10년이 넘도록 이 일을 하고 있는 걸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번역을 좋아하거든요. 어떻게 아냐고요? 번역을 안 하고 쉬어보면 알아요. 원래 자기가 어떤 것을 정말로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거기서 멀어져 보면 알 수 있잖아요. 저는 일 없어서 쉴 때 괜찮은 책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나도 저런 책 번역하고 싶다!’ ‘이 책은 내가 번역해도 잘할 수 있었을 텐데…….’ 번역을 하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했단 말이죠.


그렇게 좋아하니까 10년을 이어올 수 있었어요.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일이 끊겨서 쉴 수밖에 없는 날이 길어지면 자괴감이 들고 두려워지곤 했어요.


5년쯤 전에 일이 한 달 넘게 안 들어왔어요. 출판사에 번역 샘플을 넣었지만 번번이 낙방했고요. 그러니까 이대로 업계에서 도태되는 것 아닌가 싶더라고요. 내가 번역을 1, 2년 한 것도 아닌데 아직도 이 정도 밖에 안 되다니 다른 길을 찾아야 하나 싶기도 하고요.


그런데 배운 게 번역질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번역 외에는 할 만한 일이 생각나지 않는 겁니다. 대학 졸업하고 바로 번역 일 시작했으니까 회사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이는 서른을 훌쩍 넘었으니 어디 들어가긴 어려울 것 같고, 그렇다고 뭔가 내세울 만한 기술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어요. 이제 나는 뭐 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눈앞이 캄캄하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겠더라고요.


프리랜서 번역가로 살다보면 그런 순간이 여러 차례 닥칩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되새기는 명언이 있어요. 하나는 바로 그 5년 전 암흑기에 배우 류승수 씨가 <힐링캠프>에 나와서 한 말입니다. 영화 <고지전>을 촬영할 때 혼신의 힘을 다해 찍은 신이 있었대요. 스스로도 만족스럽고 주변 사람들도 호평했기에 개봉만 하면 세간의 주목을 받을 거라 기대했죠. 그런데 막상 영화가 극장에 걸리고 보니 그 신이 통째로 잘린 거였습니다. 상심했죠. 은퇴를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때 동료 배우 차태현 씨가 “형,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아”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너는 잘됐으니까 그런 거 아니냐” 하고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 “큰 기대 없이 최선을 다했던 영화가 <과속스캔들>이었는데 이게 잘 될줄 몰랐다. 형이 <고지전>으로 욕심을 냈을 때는 형이 원하던 때였다. 기다리면 잘 될 때가 올거다. 그 때까지 열심히 하면 된다”였더래요. 그 말을 듣고 은퇴 생각을 접었다고 합니다.


저도 그 말에서 큰힘을 얻었어요. 어떻게 보면 뻔한 말이에요. 그런데 그 말을 들으니까 ‘아직 내 때가 안 왔을 뿐이다. 일단 10년은 버텨보고 다시 생각하든 말든 하자’ 하는 용기랄까 결심이 솟더라고요.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10년을 버텼더니 숨통이 좀 틔었습니다.


제게 힘이 되는 또 하나의 명언은 예전에 가까이 지냈던 연극 연출가 선생님에게 들은 말이에요. 그분은 뜻이 맞는 사람들이 한 지역에 모여 생활을 공유하는 마을 공동체에 살고 있었어요. 언젠가 그 마을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에 그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주로 마을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해. 내가 비록 한 달에 몇십만 원 밖에 못 벌고 그렇게 공짜밥을 먹는다고 해도 나는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아. 왜냐하면 나는 내가 하는 일로 우리 사회에 공헌하고 있거든. 나는 그 밥을 당당히 먹을 자격이 있는 거야.”


그때 그분의 눈빛에는 자부심과 감사함이 공존했습니다. 그후로 저도 제 일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어요. 돈과 명예 이전에 가치를 생각하게 됐어요. 내가 번역으로 우리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생겼어요.


이상이 저를 지금껏 버티게 한 두 가지 명언입니다. 너무 뻔한 말들이라고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그 말을 마음에 새길 때 생기는 힘입니다.




자, 정리해볼까요. 저는 프리랜서 번역가로 꿋꿋이 살아가기 위해 습관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되새깁니다.


1.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

2. 나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

3. 내가 빛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몇 년 전에 번역가를 지망하는 분과 통화를 했어요. 여러 가지 질문에 답한 후 마지막으로 받은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끝으로 저에게 해주실 조언이 있나요?”


그때 저는 위에서 선생님이 제게 해주신 말을 그대로 해줬습니다. 이 일은 돈도 명예도 잘 안 따른다고요. 그래서 솔직히 권하기 어렵다고요. 그러면서 자신이 이 일을 정말로 좋아하는지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 했습니다.


번역을 둘러싼 상황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아요. 제가 어릴 때부터 불황이라던 출판계는 이제 차라리 그때가 호시절이었다고 합니다. 제 경험에 비춰보면 번역료 상승률은 평균 임금 상승률에 훨씬 못 미치고요. 그리고 기계번역의 발전 속도가 무서운 수준입니다.


하지만 어떡해요, 좋으면 해야죠. 어차피 내가 말려도 할 사람은 할 거잖아요? 10여 년 전의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그러면 기왕에 할 것 자기가 하는 일의 가치를 믿으세요.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믿으시고요.


그게 제가 이 글을 마치면서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글은 좋은 습관 연구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 외부 활동을 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