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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Jan 20. 2020

마흔, 남자가 좋아지는 나이

사실은 아직 서른아홉이지만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가 있는 동안 텔레비전을 실컷 봤다. 모처럼 소리 켜놓고 볼 수 있으니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밥 먹으면서도 보고 저녁에 쉬면서도 보고 자기 전에도 보고 아주 끼고 살았다. 일단 요즘 인기라는 <스토브리그>를 정주행하고 <사랑의 불시착>을 시작했는데, 1화 마지막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이 막혔다. 현빈과 손예진이 마주 보면서 클로즈업되는 장면이었다.


손예진 때문에 숨이 막혔다는 뻔한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현빈 때문이니까. 저 날렵한 턱선! 저 오똑한 콧날! 부리부리하면서도 선량한 눈빛! 진짜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오해 마시길. 나는 이성애자다.


그런데 요즘 그렇다. 잘생긴 남자 배우들에게 눈이 간다. 여배우도 좋지만 남자 배우에게 더 정이 가고 호감이 간다. 마흔쯤 되니까 생긴 변화다.


여배우를 좋아하는 건 이제 좀 부담스럽고 재미가 없다. 부담스러운 건 아내 말고 다른 여자를 생각하는 게 뭔가 죄를 짓는 기분이 들어서 그렇다. 이젠 평생 한 여자에게 매인 몸이 되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딴 여자를 좋아해 봤자 뭐 하나. 손만 잡아도 죄가 되는데.


그렇다고 내가 결혼을 안 했으면 여배우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수 있었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공상이나마 할 수는 있잖아. 이를테면 어느 여배우에게 내 번역서를 한번 읽어보라고 보냈는데 그게 계기가 되어 연락을 주고받다가 호감이 싹트고… 뭐, 그런. 알지 나도, 그 가능성이 1퍼센트도 안 된다는 거. 하지만 인류가 발전한 것은 그 1퍼센트도 안 되는 가능성을 붙들고 상상의 날개에 매달린 사람들 덕분이다.


그런데 결혼과 동시에 그 1퍼센트마저 사라졌다. 상상의 날개는 꿈에서도 허용되지 않는다.


아닌 게 아니라 간밤에 꿈을 꿨는데 미모의 여대생과 눈이 맞아서 함께 가로등이 켜진 길을 걷고 있었다. 이제 골목 하나만 더 돌면 그녀의 집이고, 이미 나는 그곳에서 벌어질 어른들의 일에 가슴이 마구 뛰는데, 골목을 도는 순간, 아내가 아이를 안고 차가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거다. ‘하아, 좆됐다.’ 진짜 딱 그 심정이었다. 나는 여대생을 내팽개치고 냉정하게 돌아서 걸어가는 아내를 쫓아가며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근데 참 이상하지. 분명히 꿈속에서 나도 대학생이었는데 그때 만나지도 않았던 아내는 물론이고 아직 태어날 준비조차 하지 않았던 아들은 도대체 왜 나타난 거야?


이러니 내가 여배우를 마음 놓고 좋아할 수가 있나. 그러니까 남자 배우한테 눈이 가는 게 당연하지.


예전의 나는 남자 배우들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부모 덕에 타고난 외모나 뜯어먹고 사는 인간들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데는 질투심이랄까, 박탈감 같은 게 있었다. 나는 이 좋은 시절에 연애도 못 하고 빌빌거리는데 니들은 잘생겨서 좋겠다, 나도 니들 외모면, 진짜, 와, 진짜, 뭐, 이런 마음.


물론 안다. 말도 안 되는 거. 어차피 배우들은 내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우리는 지구인과 화성인처럼 서로 사는 세계가 달랐다. 그리고 내가 연애를 못 하는 건 외모를 떠나서 땅바닥에 떨어져 발에 차이는 자존감 때문이었다. 나도 잘 알았다. 아니, 설마 진짜 외모 때문이었던 건 아니겠지? 어쨌든 내 피해의식을 달래기 위해 애꿎은 그들을 손가락질했다.


그런 마음에 변화가 생긴 것은 취미로 연극을 하면서였다. 내가 직접 연기를 해보니까 연기는 절대로 잘난 얼굴이나 뜯어먹고 사는 짓이 아니었다. 연기가 고도의 전문 기술이며 아무리 타고난 재능이 중요하다고 해도 노력 없이는 절대 프로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때부터 나는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스토리 외에도 연기를 보는 재미를 알았다. 사소한 동작이나 말투에서 노력이나 고민의 흔적을 엿보면서 감탄하는 게 내 인생의 낙 중 하나다. 연기자에 대한 생각이 바뀌자 배우라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열렸다.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는 내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것이다. 솔직히 말해 20대 때 나는 결혼은커녕 죽기 전에 연애나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20대가 끝나자마자 연애를 시작해서 이제는 애까지 낳고 잘살고 있다. 지금은 이런 마음이다. ‘야야, 잘생기면 뭐하노, 니들도 결혼해서 애 낳아봐라, 뒤진다, 진짜’ 내지는 ‘아이고, 니들도 집에 가면 애 보느라 뒤지겠다, 진짜’. 애 키우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이제 와서 잘생겨봤자 무슨 소용인가. 아니, 잘생기면 물론 좋기야 하겠지만, 이제 그런 건 내 인생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게 됐다. 신이 뒤늦게나마 내게 잘생김을 주시려 한다면 그냥 내 아이한테 몰빵해 달라고 하겠다.


요컨대 나는 예전의 피해의식이 사라졌다. 피해의식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못 보게 한다. 그걸 벗으니까 이제는 남자 배우들이 있는 그대로 멋있게 보인다. 최근에 <신세계>를 다시 봤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이정재가 담배를 물고 싱긋 웃는 게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나도 담배를 피운다면 저렇게 피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나는 담배를 안 피우니까 이정재 따라 한다고 꼴값 떨진 않겠지만.


꼴값은 얼굴값의 속된 말인데 예전의 나는 사람의 인생이 꼴값에 달렸다고 오해했다. 이성적으로는 그게 아닌 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진짜 꼴값이었다. 이제라도 정신 차렸으니 다행이다. 인생은 꼴값이 아니라 몸값에 달렸다. 아니, 이러면 너무 자본주의에 찌든 속물 같나. 실제로 그렇긴 하지만 기왕이면 마음이 따뜻한 자본주의자로 포장하면 몸값이 더 오르겠지. 좋아, 그럼 인생은 마음값에 달렸다고 하자. 인생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고들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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