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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Jan 31. 2020

아내의 휴가

째깍째깍. 시계가 간다. 있는 시계라고는 디스플레이 속의 고요한 시계들뿐이지만 마음속에서 초침과 분침이 우렁차게 움직였다.


오전 9시가 훌쩍 넘었지만 아직 원고가 완성되지 않았다. 색인이 복병이었다. 항목이 줄잡아 천 개는 되는 것 같았다. 색인 번역은 원래 어렵다. 내가 무엇이라고 번역했는지 일일이 찾아봐야 한다. 그냥 단어만 보고는 애매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cost’라면 내가 본문에서 ‘비용’이라고 썼는지 ‘가격’이라고 썼는지 확인해야 한다. 왔다 갔다 하느라 시간은 시간 대로 드는데 실제로 분량은 많이 나오지 않으니 돈이 안 되는 작업이다. 번역하면서 제일 싫은 게 색인 번역이다. 극혐.


다행히 아이는 잠이 들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작업해야 한다. 그러면서 정확성도 기해야 한다. 마음은 급한데 마냥 급하게 처리할 수만 없으니 속이 탄다. 아이가 깨면 큰일이다.


아내는? 미용실에 갔다. 아니, 남편이 마감과 사투를 벌이는데 한가롭게 머리나 하러 가는 여편네라니… 라고 하면 안 될 게 내가 가라고 등 떠밀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어제 번역이 끝났을 것이고, 어제 밤에 급히 변경한 계획대로라도 오늘 오전 9시에는 끝났을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미용실 예약을 잡아 놓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직 내가 일을 못 끝낸 걸 보고 가지 말까 하는 걸 가라고 했다.


오늘부터 2박 3일간 아내에게 휴가를 줬다. 열흘 전부터 호기롭게 말했다. 나 이번 책 마감하면 어차피 주말 끼어 있으니까 여행을 가든 뭘 하든 하고 싶은 거 하라고. 이렇게 마감일에 똥줄 탈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한 말이다. 웬만하면 마감일 전에 일을 다 끝내는 나니까.


이번 책은 만만치 않았다. 찾아봐야 할 것도 많고 문장도 말랑말랑하지 않아서 심하면 원서 기준으로 겨우 3~4쪽 번역하는 게 다인 날이 많았다. 참고로 평소 속도는 하루 6~8쪽이다. 그래서 당초 두 달이면 떡을 칠 줄 알았는데 석 달을 꼬박 채우고도 마지막 날 개고생 중이었다.


아이가 깼다. “아이씨, 왜 벌써 깨!”라고 신경질을 냈다. 물론 옆방에 있는 아이한테는 안 들리도록 소리 죽여서. 아니, 한번 잤으면 기본적으로 1시간은 자 줘야지, 30분 만에 깨면 아빠가 짜증이 나, 안 나? 그런데 참 신기하지. 평소 같았으면 안아서 데리고 나올 때까지 찡찡댔을 아이가 혼자서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러고는 정말 절묘하게 내가 작업을 다 끝내고 원고를 송부하기 직전에 다시 일어났다. 타이밍 한번 기막힌 건 지 엄마를 똑 닮았다. 아내는 종종 내가 어딘가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 “도착했어?”라고 톡을 날린다. 어디 CCTV라도 달아놨는지 무슨 감시자처럼 기똥차게 타이밍을 맞춘다. 오늘은 아들이 CCTV를 가동한 것 같다.


아내는 집에 와서 조금 늦은 점심을 급히 먹고 다시 나섰다. 다음주에 출산인 직장 동료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렇게 종일 바깥을 싸돌아다니고 저녁 5시쯤 돌아왔다. 그러고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냥 내일 갈까?”


어디? 처가. 아내의 휴가 계획은 친정에 가서 마음 편히 놀다오는 것이었다. 내일 처제와 영화 보고 카페 가고 시간 있으면 옷도 사러 가기로 미리 약속을 잡아놓았다. 나는 기왕 가는 것 오늘 아침 일찍 가라고 했지만 머리하고 동료 만난다고 저녁에 버스를 타고 간다더니 저녁이 되니까 내일 갈까, 라니. 아니, 왜?


왜긴, 애가 눈에 밟히니까. 맨날 끼고 살던 녀석을 두고 밖에서 두 밤이나 자려니까 내가 그래도 되나, 하는 어딘가 찜찜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애 떼놓고 쉴 생각에 설레면서도 애 떼놓고 쉴 생각에 죄책감 비슷한 게 드는 게 엄마 마음이다. 더군다나 아빠라는 작자는 ⟪프랑스 아이처럼⟫식 육아라면서 애가 짜증내면 지도 짜증내고 애가 울면 그냥 울게 놔두기도 하는, 본인 스스로도 책은 핑계고 그냥 지 꼴리는 대로 애 키운다고 생각하는, 요상한 육아법을 쓰는 인간이니, 과연 부자가 이틀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불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아니, 했을 것이다, 가 아니라 몇 번이나 “둘이 잘 지낼 수 있어?”라고 물었다.


내가 아내한테 맨날 하는 말이 있다. 질척거리는 스타일이라고. 쿨하게 딱 끊고 돌아서질 못한다. 아이가 엄마한테 자꾸만 앵기려 하는 것도 질척거림 유전자를 물려받은 거라고 말한다. 그런 말 해도 되냐고? 아내는 맨날 나한테 “쟤 겉은 난데 속은 김고명이야, 어쩔 거야, 책임져”라고 말하는데, 뭘. 뭐든 금방 싫증 내고, 뭔가 하려다가 안 되면 금방 짜증 내고 관두는 게 딱 날 닮았다고. 괜찮다, 아들아, 아빠 봐라, 그래도 사람 구실하고 살잖아.


여하튼 그렇게 질척이면서 갈까 말까 하는 걸 또 등 떠밀어서 보냈다. 마침 아내가 좋아하지만 아이 때문에 못 가던 식당이 터미널 근처로 옮겼으니까 미리 가서 거기서 저녁 먹고 가라고 했다. 아내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아이에게 인사를 하고 무거운 걸음 반, 가벼운 걸음 반으로 집을 나섰다.


나중에 보낸 사진을 보니 밥 맛있게 잘 먹은 것 같다. 친정에도 잘 도착했다. 아내는 오늘 두 다리 쭉 뻗고 잘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일단 존재감부터 과시하고 보는 아이가 없으니 꿀잠 잘 것이다. 내일은 종일 싸돌아다니고 피곤해서 금방 뻗을 것이다.


나? 나야 고생문이 열렸지. 오죽하면 장모님이 아내한테 전화해서 나랑 애 데리고 다 같이 내려오라고 하셨을까. 혼자 보면 힘드니까 차라리 다 내려와서 애 두고 놀러가라는 뜻이었다. 근데 그러면 아내가 마음 편히 못 쉰다. 애가 가까이 있으면 나갔다가도 금방 들어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엄마 찾는 애 때문에 마음 편히 누워 있지도 못한다.


그러니까 이번 주말은 내가 대신 고생하기로 했다. 그간 남편 일한다고 혼자 애 보느라 고생한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마워서 그렇다. 나는 염치가 있는 남자다.


그리고 고생은 고생이고 아내가 없으면 좋은 점도 있다. 눈치 안 보고 먹고 싶은 거 시켜 먹을 수 있다는 것. 고로 내일은 점심 저녁 모두 피자 파티다! 의사 선생님이 기름진  줄이랬는데 괜찮아, 이럴  염치  없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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