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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Feb 08. 2020

글이 제일 잘 써질 때

는 바로 할 일 없을 때

우리 애는 원래 혼자 잤다. 조리원 나온 날부터 거실에서 혼자 잤고 얼마 후부터는 자기 방에서 혼자 잤다. 보통 생후 몇 달 지나고 나서 혼자 재운다는데 우리 부부는 무슨 깡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안방에서 자다가 애가 울면 달려가서 달래고 다시 돌아왔다.


아이는 혼자서도 제법 잘 잤다. 돌 전까지는.


돌 무렵부터 재우려고 하면 싫다고 난리를 치고 엄마든 아빠든 못 나가게 했다. 울려도 보고 달래도 봤다. 사투를 벌이다시피 하며 재워놓아도 새벽이면 깨서 자지러지게 울었다. 울려도 보고 달래도 봤다.


졌다. 지금은 둘 중 한 명이 아이 방에서 같이 잔다. 안방에서 세 식구가 다 같이 잘까 생각도 해봤지만 둘 중 한 명이라도 숙면을 취하기 위해  따로 자기로 했다. 피치 못한 각방 생활이다.


보통 일~목요일 밤에는 내가 같이 자고 금, 토는 아내가 들어간다. 평일 낮에 아내가 아이를 보니까 밤에는 좀 쉬라는 뜻이 반영된 시스템이다.


엄마와 잘 때는 가끔 새벽에 깨서 보채는 아이지만 아빠와 잘 때는 그런 거 없다. 아침까지 쭉 자거나 새벽에 깼다가도 아빠가 “자라” 한마디 하면 잔다. 아빠는 보채도 소용없다는 걸, 한 판 붙으면 자기도 울다가 땀범벅이 될 만큼 타격이 심하다는 걸 아니까.


대신 자기가 일어나기 전에 아빠가 방에서 나가는 건 용납을 안 한다. 새벽에 내가 나가면 무슨 동작감지센서라도 달렸는지 벌떡 일어나서 운다. 며칠 전에는 오줌이 마려운데 나가면 울고 나가면 울어서 몇 번이나 들락거렸다. 전날 새벽에 애가 엄마랑 자다가 하도 울어대서 윗집에서 쿵쿵 발 구르는 소리가 났기 때문에 되도록 안 울리려 했지만 안 그러면 내 요도가 울 것 같아서 얼른 싸고 들어왔다.


나는 일찍 일어나는 체질이다. 잠을 잘 자면 새벽 3시에도 깨고 5시에도 깬다. 요즘 아이가 밤에 잘 자니까 나도 푹 자고 일찍 눈이 떠진다. 원래 그럴 때는 서재로 건너가서 일을 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이 방에서 나갈 수가 없다. 영락없는 감옥이다.


몸은 붙잡혀 있는데 정신은 말똥말똥하다. 어두운 방에서 명상을 할 것도 아니고 딱히 할 게 없어 폰을 켠다. 하지만 웹서핑이나 하자니 맑은 정신이 아깝다. 그래서 요즘 구독하는 쿼츠와이어드에 뭐 재미있는 게 올라왔나 보고, 요즘 하도 호황이라길래 미국 주식에 넣어 놓은 내 돈이 밤새 잘 있었나 확인하고, 그래도 아이가 일어나려면 1시간이 넘게 남아 글을 쓴다. 며칠 전부터 생긴 습관이다.


안 그래도 글을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도 저녁에 일 마치고 나면 그저 늘어져 있고 싶어서 미루기 일쑤였다. 그나마 써놓은 글도 수정하기 귀찮아서 미루다가 지워버린 게 한두 편이 아니다.


그런데 이제는 새벽에 꼼짝없이 아이 방에 갇혀 있으니 그 시간에 글이나 쓴다. 의외로 글을 쓰면 시간이 잘 간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글을 쓰는 건 시간 때우기 좋은 수법이다.


훈련소 때 일이다. 참고로 나는 공익 출신이라 6주간의 훈련이 군대 경험의 전부다. 공익이라고 해도 훈련 강도만 다를 뿐 구색은 다 갖춰서 밤마다 돌아가며 불침번을 섰다. 어느 날 밤 불침번을 서고 돌아왔는데 다음 차례인 동기가 일어나지 않았다. 깨워도 안 일어났다. 작정하고 안 일어났다.


진짜 빡쳐서 철모로 그 커다란 대가리를 후려치고 싶었다. 그러지 못했던 건 물론 뒷감당이 무서워서였다. 폭행으로 처벌받는 것도 처벌받는 거지만 그 새끼가 맨날 하던 말이 귀 위쪽 머리 안에 혹이 있어서 공익 왔다는 거였다. 괜히 후려쳤다가 그게 터지면 그땐 그 새끼만 아니라 내 인생도 좆되는 거였다.


그 씨발새끼를 옆에 두고 별 수 없이 또 불침번을 서러 나갔다. 나라도 안 나가면 최소한 우리 내무반은 죽었다고 봐야 했으니까. 그 새끼는 내가 그럴 걸 알고 처잤겠지.


졸라 빡쳤지. 잠을 못 자는 것도 못 자는 거지만 한 시간 동안 할 일이 없으니까 더 그렇지. 근데 주머니를 뒤지니, 아 그때 그 새끼 확 뒤져버리란 심정이었는데, 어라, 메모장과 펜이 나오네? 에라, 할 일도 없는데 글이나 써야지. 개새끼 뒤지라고.


메모장에 분노의 펜질을 하다 보니까 신기하게도 부글부글 끓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시간도 앞 시간보다 빨리 갔다. 편한 마음으로 돌아와서 잘 잤다. 그놈도 다음부터는 제때 불침번을 나갔다.


글쓰기는 달리 할 일 없을 때 시간 때우기용으로 제격이다. 역으로 말하면 글을 집중해서 쓰려면 달리 할 일이 없어야 한다. 이 글만 해도 아이 방에 갇혀 있을 때는 쭉쭉 썼지만 지금 안방에서 마저 쓸 때는 벌써 몇 번이나 베어(글쓰기 앱)와 사파리(웹브라우저)를 오갔는지 모른다.


작가 이외수는 젊은 시절 일부러 집 안에 감옥을 만들어두고 거기서 글을 썼다고 한다. 나도 이제 집 안에 감옥이 생겼…… 이봐, 이봐, 또 글 쓰다 말고 알라딘 가서 ⟪황홀한 글감옥⟫ 검색하고 자빠졌잖아. 참고로 그 책은 이외수가 아니라 조정래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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