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의 OO벌이
요즘 옛날 영화가 땡긴다. 마침 지난 명절에 구글 플레이에서 <영웅본색> 시리즈를 편당 600원에 팔길래 사면서 <비트>도 같이 샀다. 97년작이지만 이번에 처음 봤다. 어두운 거리, 폭력배, 반항기 가득하지만 순수한 주인공, 오토바이, 의리. 어딘가 8~90년대 홍콩 영화 분위기가 나서 좋았다. 그러고 보면 같은 감독의 최신작 <아수라>도 홍콩삘이 나서 좋았다. 홍콩 영화가 극장가와 비디오판을 주름잡던 시절에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세대라 그런가.
<비트>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건 극이 진행될수록 정우성과 임창정의 연기력이 발전한다는 거다. 한강에서 임창정의 어이없는 말에 정우성이 피식 웃는 씬, 그게 전환점이었던 것 같다. 오, 연기 좋고. 그때부터 두 배우가 생각과 계산보다는 감정에 더 기대서 연기하는 것 같았다. 둘 다 이 영화를 찍고 흥행 성적보다 자신의 성장에 더 큰 보람을 느꼈을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내가 번역에 보람을 느끼는 이유도 똑같다. 책을 한 권 번역할 때마다 내가 발전한다. 지적으로. 번역은 책을 읽는 것과 다르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책을 읽을 때 문장 하나하나를 꼼꼼히 이해하며 읽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냥 대충 이런 뜻이겠지 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번역할 때는 모든 문장을 완벽에 가깝게 이해해야 한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저자가 문장에 담은 정보를 모두 습득하고 때로는 더 정확한 번역을 위해 그 이상의 정보를 찾아보게 된다. 그래서 책 한 권을 옮기면 다양한 지식이 쌓인다.
예를 들어 이번에 공유 경제에 대한 책을 번역했는데 18~20세기 미국 노동 운동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내가 그쪽 전문가도 아니고 번역을 시작할 때만 해도 솔직히 아는 게 별로 없었다. 하지만 책을 번역하면서 필요에 의해 여러 자료를 찾아봤다. 덕분에 근현대 미국 노동사를 기본은 안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어디 가서 써먹을 건 아니지만 나는 원래 지적 허영심이 있는 인간이라 이렇게 뭐든 지식이 쌓이는 게 좋다. 그냥 그 자체로 즐겁다.
아니, 아주 써먹지 못하란 법도 없는 게 이런 잡지식은 뜻밖의 상황에서 빛을 발하기도 한다. 예전에 아내 친구들이 부부 동반으로 모인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중에는 곧 결혼을 앞둔 커플도 있었는데 남편 될 사람이 미국인이었다. 우리와 한국어로 대화하는데 위화감이 안 들 만큼 한국어를 곧잘 하는 친구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못 알아들어도 다 알아듣는 척했다지만. 오, 연기 좋고.
대화 중에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친구가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한국말로는 어려워서 못하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다들 여기 번역가가 있으니 미국말로 하라는 것이다. 솔직히 긴장했다. 난 영어 읽기에만 특화된 인간이라. 하지만 결과적으로 통역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건 내가 그전에 ⟪마이크로트렌드⟫를 번역하면서 트럼프에 대한 미국 대중의 정서, 선거인단제도의 맹점을 포함해 미국 정치 전반에 대한 기초 지식을 습득한 덕분이었다. 그 덕에 체면은 살렸다.
이게 번역의 맛이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언제 또 쓰일지 모르는 온갖 지식이 뒤죽박죽 쌓여 있다. 오늘도, 내일도 또 쌓일 것이다. 번역가는 돈벌이는 시원찮을지 몰라도 지식벌이는 쏠쏠한 직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