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쓴 글(<작업이 물 흐르듯 진행되도록 매일 미리 읽습니다>)에서 번역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원서를 끝까지 읽는 게 좋다고 했다. 전체적인 흐름과 분위기를 파악하면 번역이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책의 키워드가 무엇인지 알아두면 나중에 가서 같은 단어를 다르게 번역했다고 일일이 확인해 가며 수정할 필요가 없다. 저자의 문체를 파악해 어떤 식으로 번역할지 대략적으로나마 생각해두면(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가볍게 가자, 박력 있게 가자,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문장에 통일성이 생긴다.
그런데 일로 책을 읽는 게 쉽진 않다. 평소에는 누가 안 시켜도 읽는 책인데도 의무감에 읽으려 하면 손이 안 간다.
이때 좋은 건 오디오북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오디오북 시장이 크게 형성되어 있다.
저자가 직접, 혹은 전문 성우가 책을 읽어준다. 예전에는 테이프나 CD의 형태로 판매됐지만 요즘은 아마존 자회사인 오더블이 대세다. 아마존에서 킨들 전자책을 사면 오더블판 오디오북은 할인해준다.
듣기는 읽기만큼 집중력을 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디오북은 짬짬이 들으면 된다.
오디오북의 힘은 나도 이번 책을 번역하면서 알게 됐다. 처음에는 킨들판으로 읽었는데 평소 같았으면 분명히 재미있게 읽었을 내용인데도 꼭 읽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읽으니까 도통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때마침 아마존에서 알림을 보냈다. 단돈 X달러에 오더블도 얹어 드립니다!
잠잘 때 듣자는 생각으로 샀다. 실제로 매일 밤 이불 덮고 누워서 들었다. 귀에다 누가 영어로 쏼라쏼라 해대니까 잠도 솔솔 오고 좋았다. 잠이 안 오면 책을 더 많이 읽을(들을) 수 있으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잘 밤에 누워서 어두컴컴한 데서 눈 아프게 폰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더군다나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이점도 있었다. 소리로 들으면 책의 분위기가 생생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특히 저자가 직접 읽었다면 그게 곧 저자가 의도한 분위기라 확신해도 좋다.
이번 책이 그랬다. 저자가 경쾌하고 에너지 넘치는 목소리로 틈틈이 장난기까지 섞어 가며 읽었다. 그래서 번역도 그 목소리에 맞추기로 했다. 내 귀에 그 목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하며 번역하고 있다. 그러면 책의 내용만 아니라 문체까지 저자의 의도에 맞출 수 있다.
처음 번역을 배울 때 선생님이 문장의 내용을 눈앞에 그려보라고 하셨다. 그건 지금도 내가 마음에 새기고 있는 말씀이고 확실히 마음의 눈으로 저자가 말하는 것을 보고 안 보고는 번역에서 큰 차이를 만든다. 거기에 더해 이제는 문장을 귀로도 듣기까지 하니까 번역의 질이 더욱 좋아질 것이다.
오디오북을 산다고 출판사에서 돈을 더 주진 않는다. 킨들 전자책도 출판사에서 주는 PDF 원고를 읽는 게 불편해서 내 돈으로 사는 거다. 하지만 둘이 합쳐 2-3만 원이면 충분하다. 그 정도 돈으로 원문의 맛을 더욱 잘 살릴 수 있게 된다면 투자수익률이 절대 나쁘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