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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Mar 10. 2020

귀신보다 무서운 것

10년쯤 전 일이다. 새벽에 볼일을 보고 집에 와서 다시 잠을 청했다. 피곤했던지 금방 잠이 들었고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떴는지 방 안이 환했다. 누가 눈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누구지?


머리털이 쭈삣 섰다. 나 혼자 사는 원룸이었고 나 말고는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눈을 부릅뜨고 일어나려 했지만 온몸이 주술에 걸린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떠도 손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어도 목구멍까지만 차오를 뿐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때 나는 교회에 열심이었다. 새벽의 볼일이란 것도 특별새벽기도 주간에 찬양대로 서는 것이었다. 당연히 나는 예수님께 부르짖었다.


“예수님, 예수님, 살려주세요.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아, 물러가라!”


그렇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퇴마의 외침을 몇 번이나 날린 후에야 나는 비로소 가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만 아니라 몸이 너무 피곤하면 가끔 그렇게 귀신 꿈을 꾸고 가위에 눌렸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을 찾았다.


엊그제도 그랬다. 굿판이 벌아지고 있었다. 무당이 누군가 귀신을 받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람들이 서로 마주 보며 웅성거렸다. 나는 누가 희생양이 될지 이미 알고 있었다.


과연 무당이 나를 지목했다. 그 순간, 내 눈이 번쩍 뜨이고 턱이 들리면서 입이 쩍 벌어졌다. 붉은 하늘에서 악령이 나를 향해 내려오더니 입 속으로 쑥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예수님을 찾지 않았다. 다만 속으로 악령에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되다. 마 빨리 들어오고 챠뿌소.”(제가 좀 피곤해서요. 속히 빙의하시고 어서 끝내시죠.)


그날은 3주간 독박에 가까운 육아로 피로가 극에 달해 있었다. 피곤해 죽겠는데 귀신이고 나발이고. 그렇잖아도 저 말을 하는 순간, 잠이 깼다. 낮에 애 보려면 더 자야 하는데 귀신은 왜 들어와서 잠을 깨우고 지랄이야.


귀신보다 무서운 것. 그것은 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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