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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Aug 06. 2018

번역과 게임과 나

나를 번역가로 키운 건 팔 할이 게임이다. 게임은 내게 영어 공부의 장이었고 글 쓰기의 자극제였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던 1989년, 우리 집에 게임기가 생겼다. 이름하야 삼성 겜보이. 그때는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한 대 밖에 없던 시절이었고, 그래서 나는 가족들이 잠든 밤이나 이른 아침을 틈타 게임을 해야만 했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댔는데, 나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반만 새 나라의 어린이였다.


본격적으로 게임에 빠져든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집에 386 컴퓨터가 생기면서였다. 겜보이는 팩이 너무 비싸서 원하는 게임을 마음껏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컴퓨터는 달랐다. 당시는 불법복사가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디스켓 몇 장만 있으면 친구들끼리 게임을 복사해주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국산 게임은 고사하고 한국어로 된 게임 자체가 드물었다. PC게임은 영어, 콘솔 게임은 일본어가 주 언어였다. 당연히 영어나 일본어를 모르면 게임을 즐기는 데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입문할 때야 단순히 점프하고 칼 휘두르는 것만 해도 재미가 있을지 몰라도 어느 순간 그런 게임에 싫증이 나고 좀 더 복잡한 게임을 원하게 되는데, 그때 언어가 큰 장벽으로 작용한다.


90년대는 가히 어드벤처 게임의 황금기였다. 어드벤처 게임이란 말 그대로 세계를 모험하는 장르인데, 주로 작중 인물들 간의 대화를 통해 문제가 해결되고 스토리가 진행된다. 당연히 말을 못 알아들으면 재미는 고사하고 진행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시절의 나는 그 어드벤처 게임이란 게 그렇게도 하고 싶었다. 1992년 어린이날에는 <인디아나 존스4>를, 93년에는 <서부의 약장수>를 선물로 골랐다. 각각 어드벤처계의 양대산맥이었던 루카스아츠와 시에라에서 제작한 당대의 화제작들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 게임들을 단 몇 시간도 못 하고 포기해버렸다. 이것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먹어야 게임을 하지.

<인디아나 존스4> (출처: GOG.com)

겨우 알파벳이나 읽을 줄 아는 초등학생 주제에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게임을 골랐는지 모르겠다.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중학교 1학년이던 1995년에는 당시 ‘가격 파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국적으로 돌풍을 일으키던 세진컴퓨터랜드에서 루카스아츠의 <디그>라는 게임을 또 구입해서 역시 언어의 장벽을 못 넘고 금세 백기를 들었다.


여하튼 그렇게 게임 때문에 영어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 내가 먼저 어머니에게 영어 학원을 보내 달라고 할 정도였으면 말 다했지. 돌이켜보면 거기서 무슨 영어를 배웠는지는 모르겠고 어느 날 친구와 한바탕 싸움박질을 한 기억만 남아 있다. 학원을 몇 달 다녔지만 여전히 내 영어 실력은 감히 게임에 비벼볼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학원은 재미가 없어서 그만두고 이번에는 두툼한 영어 사전을 컴퓨터 앞에 두고 게임을 해봤다. 맨투맨 문법책도 사다가 봤다. 물론 큰 효과는 없었다. 찾아야 할 단어가 얼만데 전자 사전도 아니고 종이 사전으로 감당할 수 있었겠으며, 문법책을 펼치면 오라는 영어의 신은 안 오고 잠만 왔다.


하지만 게임에 대한 열의는 매사에 미적지근함을 추구하는 내 인생에서 그렇게 뜨거웠던 것이 있었는가 싶을 만큼 강렬했기 때문에 나는 각종 공략집을 입수해서 말은 못 알아먹어도 닥치는 대로 게임을 했다.


그런데 이런 나의 정성을 하늘도 갸륵하게 여겼던 것일까, 어느 날 갑자기 정말로 영어의 신이 내렸다. 1996년, 중2 때였다. 영어의 신이 선택한 게임은 당시 획기적인 전술 시스템으로 장안의 화제였던 <재기드 얼라이언스>였다. 게임을 실행하고 오프닝 영상이 나오는데 맙소사, 그게 무슨 뜻인지 얼추 감이 잡히는 것이었다. 완벽히 해석은 안 돼도 대충 이런 뜻이라고 때려 맞출 수는 있었다. 본격적인 게임에 들어가서도 미션 내용을 비롯해 이런저런 내용이 대략적으로 해석이 됐다. 정말 신기하고도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별안간 영어에 눈이 뜨이다니! 물론 심도 깊은 대화가 오가는 게임은 아직 무리였지만 언어의 압박이 심하지 않은 게임은 무리 없이 가능한 수준이 됐다.

<재기드 얼라이언스> (출처: GOG.com)

이후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특별히 영어 공부를 한 기억은 없다. 그냥 교과서만 봤을 뿐인데도 시험에서 거의 만점을 놓치지 않았다. 이것은 대학교(영문과) 때도 마찬가지여서 처음에만 영어로 된 긴 글을 읽는 게 익숙지 않아 헤맸지, 이후로는 그냥 수업 잘 듣고 교재 한번 쓱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적당히 점수를 따는 데 무리가 없었다.


그 사이에 장래희망도 번역가로 바뀌었다. 원래 나는 프로그래머가 되어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머리가 굵어지자 나는 분석이나 계산보다는 주먹구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프로그래머로는 실격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때마침 영어에 자신감이 붙고 게임 다음으로 하는 취미 생활이 독서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번역가로 진로가 바뀐 것이다.


이것이 게임으로 영어를 배운 나의 이야기다. 그 시절에 게임 좀 했다 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공감이 갈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번역가에게 중요한 것은 영어 실력만이 아니다. 아무리 원문을 잘 해독해도 그것을 우리말로 풀어내는 재주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나는 글 쓰는 법 역시 게임으로 배웠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90년대 초중반은 피시통신의 황금기였다. 피시통신이란 무엇이냐 하면, 지금처럼 집집마다 인터넷망이 깔리기 전에 전화선을 컴퓨터에 연결해 일종의 포털에 접속하던 통신 기술이었다. 전용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01410 같은 번호를 넣으면 띠리띠리리리 하는 기계음과 함께 통신망에 접속됐다. 전화선을 쓰니까 당연히 피시통신에 접속해 있는 동안에는 집전화를 이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집은 하루에도 몇 시간씩 전화가 불통이었다. 전화비도 한 달에 5~7만 원으로 다른 집 5배 정도는 나왔다.

하이텔 첫 화면 (출처: IT동아)

당시 내가 뻔질나게 들락거린 곳은 하이텔 게임 게시판이었다. 게시판에서 오가는 얘기는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최신 게임 소식, 소감, 공략, 온갖 잡담. 지금과 다른 점은 게시물 바로 아래에 댓글을 달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각 글에 대한 반응을 별도의 글로 작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꽤나 커뮤니케이션이 왕성했다. 나도 내 글에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이 재미있어서 날마다 꼬박꼬박 한 편씩 글을 올렸던 것 같다. 남들이 올리는 글도 거진 다 읽었다.


공개된 공간에 글을 올리는 것은 분명히 글솜씨를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남들의 평가가 의식되어 어떻게 하면 더 잘 쓸까 고민하게 되니까. 더욱이 이미 남들이 써놓은 글이 있으니 거기서 괜찮다 싶은 부분을 모방해서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 내가 모방했던 사람이 두 명 있었다. 아이디도 분명히 기억난다. HKWOOK과 ZINUS. 두 분 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HKWOOK님은 그때 유행하던 유체분리 화법을 잘 구사했다. 예를 들면…… 글쎄, 마땅한 게 생각이 나질 않는데(뭐? 그럼 아예 쓰질 마! 퍽퍽!) ☜ 이런 식으로 괄호 안의 말로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수사법이라면 수사법이었는데 나도 그게 재미있다고 참 많이도 썼다.


ZINUS님은 사실 모방했다고 하기도 그런 게 나로서는 범접할 수도 없을 정도의 필력을 뽐내던 글쓰기의 초고수였다. 그분만의 유머 감각과 이야기법은 정말 기가 막히다고 감탄을 하면서도 어떻게 흉내조차 낼 수가 없었다. 정말 나 따위는 비비지도 못할 만큼 저 위에서 노는 사람 같았다. 혹시나 싶어 방금 검색을 해보니 현재 웹툰 작가라고! 이미 그 시절부터 탁월한 작가였으니 그러고도 남을 만하다.


ZINUS님이 양질의 글을 썼다면 나는 물량 공세를 펼쳤다. 뭘 그렇게 써댔는지 모르겠는데 날마다 무슨 공장처럼 글을 찍어냈다. 그게 통했던지 매달 뽑는 게임 게시판 우수 이용자에 몇 번이나 들었다. 당시 우수 이용자에게는 정품 게임이나 게임 관련 하드웨어가 증정됐다. 그때 그런 상품을 참 많이도 받았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값비싼 사운드카드들이다.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메인보드에 사운드칩이 달려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삑삑’ 소리 외에 풍부한 음향을 듣고 싶으면 별도로 사운드카드를 장착해야 했다. 저렴한 제품은 2~5만 원, 비싼 제품은 20~30만 원까지 했는데 나는 10만 원대의 옥소리 MEF를 받고 얼마 후 20만 원대의 사운드 블라스터 AWE32를 또 받았다. 그밖에 자잘한 게임은 족히 10개는 받았던 것 같다.


그냥 내가 좋아서 글을 쓰는데 그렇게 잘한다고 선물까지 주니까 정말 글 쓸 맛이 났다. 그때 글 쓰는 재미를 알았다. 내 인생에서 글 쓰는 게 가장 즐거웠던 때였다.


글솜씨를 키우려면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해야 한다는데 나는 13~15살 때 하이텔 게임 게시판에서 자연스럽게 그 3가지를 수련했다. 그때 기초를 잘 쌓은 덕분에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아 배는 안 곯고 살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글쓰기가 그때만큼 즐겁지 않다. 번역은 재미있지만 내 글을 쓰는 것은 자꾸만 미루게 된다. 20대 중반쯤부터 글을 잘 써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들면서 자꾸만 자기 검열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글을 쓰는 게 노동처럼 느껴진다. 특히 번역가가 되고 나서는 그런 부담감이 더욱 커졌다.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의 무한 반복, 고단하다.


어떻게 하면 그런 것을 극복하고 다시 재미를 찾을 수 있을까 고민…… 따윈 해선 뭐하나. 그 시간에 게임이나 한 판 더 해야지.


그럼 20000.

요즘 내 시간을 순삭 중인 <옥토패스 트래블러> (출처: 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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