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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Jul 22. 2018

번역 에이전시에 대하여

댓글로 에이전시에 대한 문의를 받고 신속하게(내 기준에서는) 내용을 정리했다. 나는 10년째 바른번역과 함께 일하고 있고, 이 글은 어디까지나 그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사실상 바른번역에 대한 글이라 봐도 무방하다. 다른 에이전시의 사정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알린다.


1. 에이전시가 하는 일

기본적으로 출판사와 번역가를 이어주는 것이다. 에이전시를 통해 번역 일감이 번역가에게 연결되는 과정은 이렇다.


◼︎출판사에서 번역가를 지목하는 경 당연히 에이전시에서 해당 번역가에게 의사를 묻고 승낙할 경우 바로 거래가 성사된다. 출판사에서 그 번역가와 작업을 해본 적이 없다면 샘플을 요청할 수 있고 샘플 심사 후 계약이 불발될 수도 있다.


◼︎출판사에서 번역가를 지목하지 않는 경 번역가들만 볼 수 있는 게시판에 해당 도서의 정보가 등록되고 해당 언어 번역가에게 문자로 새로운 도서가 등록됐다고 통보가 된다. 번역을 원하는 번역가들이 지원을 하고, 에이전시 측에서 일정한 기준에 따라 그중에서 3명 정도를 선정해 샘플을 요청한다. 이후 출판사에서 샘플 심사를 거쳐 번역가를 선정하거나, 다른 번역가들에게 다시 샘플을 받고 싶다고 요구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의뢰를 철회할 수도 있다. 그것은 마땅한 번역가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해서일 수도 있고, 샘플을 받고 보니 그 책의 시장성이 없다고 판단해서일 수도 있다.


이 과정을 거쳐 거래가 성사되면 에이전시가 번역가를 대신해 계약을 체결한다. 번역가는 마감일에 맞춰 번역 원고를 에이전시에 전송하고 에이전시에서 이를 다시 출판사에 전달한다. 번역료 정산도 에이전시를 통해 이뤄진다. 출판사에서 에이전시에 번역료를 입금하면 에이전시에서 수수료를 제하고 다시 번역가에게 입금하는 형태다. 수수료는 그간 에이전시와 함께 작업한 책의 권 수에 따라 약 5~20퍼센트로 책정된다.


두 달 동안 번역해서 500만 원을 벌었다면 수수료로 25~100만 원이 나가는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정도 수수료를 내고 에이전시를 이용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그 답을 알려면 먼저 에이전시를 이용할 경우의 장단점을 살펴봐야겠다.


2. 에이전시를 이용할 경우의 장점

◼︎돈 떼이는 것에 대한 걱정이 줄어든다

모든 출판사가 작정하고 번역가를 등쳐 먹으려고 하는 악덕 업체는 아니다. 하지만 출판사 사정이 어려워져 피치 못하게 번역료를 지급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계약할 때 번역료 지급 시점을 도서 출간 '이후'로 잡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번역가에게 매우 불리한 계약 조건이다. 내가 원고를 넘긴다고 책이 한두 달 만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기약 없이 출간이 미뤄지거나 아예 출간 계획이 엎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에이전시를 통하면 이로 인해 돈을 떼일 확률이 크게 줄어든다. 바른번역의 경우, 기본적으로 번역 원고를 납품하고 2개월 내에 번역료를 지급하는 것으로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납품 후 5개월 내에 출판사에서 번역료를 지급하지 않을 경우, 바른번역에서 자체적으로 번역료의 80퍼센트를 번역가에게 선지급한다. 이후에 출판사에서 돈이 들어오면 나머지 20퍼센트를 받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20퍼센트는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100퍼센트를 떼이는 것보다는 분명히 나은 조건이다. 그리고 바른번역 측에서도 손해를 입지 않기 위해 출판사에 압박을 가하기 때문에 번역가가 홀로 출판사를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큰 교섭력이 발휘된다.


◼︎이름 없는 번역가가 일감을 구하는 창구가 생긴다

경력이 일천하거나 아직 무명인 번역가에게 출판사에서 먼저 작업을 의뢰하는 경우는 드물다. 애초에 출판사에서는 그런 사람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 그리고 그런 번역가가 출판사 문을 두드린다고 해도 그 문이 쉽게 열리진 않는다. 번역이 망하면 책도 망한다. 그래서 출판사는 신뢰성이 검증된 번역가를 선호한다. 이 바닥은 경력과 이름이 다다. 그래서 신진 번역가는 일을 구하기가 무척 어렵다.


하지만 에이전시를 통한다면 사정이 좀 나아진다. 출판사에서 번역가를 지목하지 않고 에이전시에 작업을 의뢰할 경우, 무명 번역가도 샘플 번역을 통해 비벼볼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도 경쟁 체제여서 무조건 일감을 따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혈혈단신으로 맨땅에 헤딩할 때보다는 에이전시의 등에 업혀가는 게 훨씬 쉬운 길이다.


◼︎업계 평균 번역료를 받을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에이전시는 단체이기 때문에 출판사를 상대로 개별 번역가보다 큰 교섭력을 발휘할 수 있다. 번역료를 올리는 것이야 여러 변수가 개입되어 있어 쉽지 않을지 몰라도 최소한 번역료가 너무 짜게 책정되는 것은 막을 수 있다. 나는 10년 전에 처음 일을 시작할 때부터 장당 3,500원을 받았는데 이후에 업계에서 장당 2,500원 수준으로 계약이 체결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요즘은 출판계가 어려워서인지 간혹 바른번역에도 장당 3,500원 미만인 번역 일감이 들어오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미리 바른번역에서 그 사실을 고지한다.


3. 에이전시를 이용할 경우의 제약점

◼︎타 에이전시와 계약 금지, 기존 거래처와 개별 계약 금지

바른번역의 경우, 번역가가 다른 에이전시를 이용하는 것이 금지된다. 출판사와 개인적으로 계약을 맺는 것은 허용되지만 이때도 그 출판사가 기존에 바른번역과 꾸준히 거래를 하던 출판사이면 안 된다. 영리기업인 바른번역의 입장에서는 출판사도 번역가도 거래처이므로 수익원을 잃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된다.


◼︎편집자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바른번역에서 출판사와 번역가의 교류를 봉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계약이 성사되면 출판사에 번역가의 연락처를 전달한다. 하지만 출판사도 번역가도 애초에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라면 바른번역을 끼고 사무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관계가 그 이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아니, 근데 생각해보니까 이건 나 개인의 성격 문제일 수도 있겠다. 다른 번역가들은 에이전시 끼고도 다 인맥을 넓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영업력은 고사하고 사교성도 썩 좋다고 할 수 없는 나에게는 바른번역을 대리인으로 끼고 있는 것이 장점이 될 수도 있겠다.


4. 굳이 에이전시를 이용할 필요가 없는 사람

이렇게 보면 번역계에 진입하는 단계에서 에이전시를 이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이 꽤 선명하게 나온다. 다음과 같은 사람에게는 굳이 에이전시가 필요 없다.


1. 인맥, 사교성, 영업력 등이 좋아서 맨땅에서 시작해도 일감을 물어올 수 있는 사람

2. 출판사에서 한번 승부를 걸어봐도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의 명성이나 경력 같은 후광이 있는 사람


1번은 딱히 생각나는 사례가 없고, 2번은 최근에 번역서를 출간한 원더걸스 출신의 우혜림 씨가 좋은 예다. 어릴 적부터 외국에서 살아 영어에 능통하고 아이돌 출신으로 현재 통번역학과에 재학 중인 만큼 그 존재 자체로 독자의 관심을 끌 만하니까 번역 경험이 좀 부족해도 출판사에서 일을 의뢰했을 것이다. 이 정도로 출판사 관계자와 독자의 눈에 확 띌 만한 강점이 있다면 에이전시를 끼지 않고 홀로서기가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에이전시를 이용하는 쪽이 훨씬 편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도전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단 혼자서 부딪혀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난 애초에 그런 정신 같은 건 없는 사람이니까 처음부터 편한 길을 택한 것이고.


5. 어떤 에이전시가 좋을까

이건 나도 다른 에이전시에 대해서는 모르니까 무엇이라고 확답을 해줄 수는 없다. <번역가들은 무엇을 전공했을까>에 내가 조사한 72명의 번역가 중 에이전시에 등록된 사람들의 현황에 대한 통계가 있으니 그것을 참고해서 실제로 각 에이전시에 속한 번역가에게 의견을 묻는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내게 묻는다면 번역가로서 입지를 다지는 데 바른번역이 큰힘이 됐다고 말하겠다.


참고로 에이전시를 선택할 때 다음과 같은 점은 꼭 알아봤으면 좋겠다.


◼︎내 이름으로 역서가 출간되는가

말했다시피 이 바닥에서는 경력과 이름이 다다. 그리고 경력으로 인정받는 것은 표지에 내 이름이 똑똑히 박힌 역서뿐이다. 남의 이름으로 번역을 하는 것은 남의 명의로 된 통장에 적금을 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중에 가서 내 거라고 아무리 하소연해봤자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평균적인 계약 단가가 얼마인가

어디까지나 내 추정이지만 출판계의 평균적인 번역료는 장당 3,500원 정도가 아닐까 싶다(영한 번역 기준). 초보 번역가라면 그보다 낮은 번역료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한참 밑으로 내려가면 수수료 떼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못해도 장당 3,000원은 받는 것이 죽어라 일해서 남 좋은 일만 시켜준다는 자괴감이 들지 않는 수준일 것 같다.


◼︎번역료가 제때 지급되는가

출판사가 돈을 안 주는 것도 문제지만 에이전시가 안 주는 것도 문제다. 출판사든 에이전시든 번역가가 개인으로 맞서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애초에 그런 에이전시는 거르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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