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 오늘도 내 마음은 출렁인다

by 김콤마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2014년 4월 16일부터 며칠, 아니, 몇달간 그리 슬프지 않았다. 큰 배가 침몰하고 당국의 대응 미비(혹은 부재)로 수백 명, 특히 꽃다운 아이들이 생을 마감하며 슬픔의 파도가 온 나라를 집어삼켰을 때 나는 한 걸음 뒤에서 그저 지켜보는 사람이었다. 참사를 부른 자들에게 다만 분노했을 뿐 다른 많은 사람처럼 울적하고 우울하진 않았다. 원래 무덤덤한 성격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사건이 내게는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었다.


요즘 종종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몇 년 전 친구의 장례식에 갔을 때다. 학창 시절에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결혼식에도 다녀왔고, 그렇게 영정으로 마주하기 한 달 전쯤에 다른 친구의 결혼식에서 인사도 나눴던 친구였다. 그는 미국 출장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삼십 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처자식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상주인 그의 부인은 하얗게 샌 머리가 검은 상복과 대조적이었고 배가 불룩했다. 배 속의 아이는 둘째, 첫째는 네 살이라고 했다.


나는 문득문득 그녀가 생각난다. 그리고 얼굴을 모르는, 그들 부부의 첫째 아이가 떠오른다. 아빠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된 후 아이는 아침저녁으로 얼마나 아빠를 부르고 찾았을까. 그 조그만 게 아빠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만든 죽음이란 현상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아이에게 아빠는 이제 못 온다고 말하고 달랬어야 할 그녀는, 자기 마음 추스르기도 힘든 때에 마음 놓고 슬퍼할 겨를도 없이 아이의 마음부터 챙겨야 했을 그녀는 가슴이 도대체 몇십, 몇백 번이나 부서졌을까.


내가 그녀를 생각하는 건 내게도 아이가 생기고부터다. 아이가 태어난 후 나는 종종 아내의 죽음을 생각한다. 아내가 어디 아픈 사람도 아니고 쓸데없는 걱정이다. 하지만 가족의 죽음을 생각하는 건 내가 벌써 수십 년간 떼내지 못한 버릇이다. 그 기원은 열일곱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 나는 야자 시간에 단체 기합을 받던 중에 호출을 받고 교무실로 내려갔다. 이모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병원에 계시댔다. 병원에 도착한 나는 바로 영안실로 안내됐다. 아침에 멀쩡히 출근했던 사람이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와 마지막 인사 같은 건 하지 못했다.


번역가가 된 후 사별에 대한 책을 번역했는데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당사자나 주변인이 인지하지 못해도 정신적으로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라서 심리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다고 한다. 나는 열일곱 살 때 그런 걸 몰랐다.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죽고 나서 얼마간은 슬픔을 느끼지 못했는데 나 스스로 그런 감정을 차단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등교해 수학여행까지 다녀왔고 아무렇지 않게 평소와 같은 생활을 지속했다. 그게 정상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때 나는 심리 치료가 필요한 건 아니었을까.


여하튼 이후로 나는 자꾸만 가족의 죽음을 상상하게 된다. 이제 내게 가장 가까운 가족은 아내와 아이다. 내 상상 속에서 아내는 벌써 수도 없이 죽었다. 그러면 저녁마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에게 무어라고 말해줘야 할지, 그 모습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도무지 상상이 안 간다. 내 마음도 무너질 대로 무너졌는데 엄마를 마냥 기다릴 세 살 아이까지 지켜야 심정이라니. 반대로 내가 먼저 떠나면 아내가 그 짐을 어떻게 감당할지 생각해보면 그 역시 먹먹하다.


생각하기 싫어도 자꾸만 하게 되니 병이다. 다행히 생활에 그리 큰 해를 끼치진 않는다. 다만 아침에 아내가 아이를 등원시키고 출근하려고 집을 나설 때 꼭 문간에 서서 둘에게 인사를 하게 된다. 혹시 그들도 아버지처럼 마지막 인사를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 때문에. 물론 부디 그런 일이 없길 바라지만.


그러고 보니 친구의 처형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들 부부는 아이를 세 살 때 먼저 보냈다. 아이는 아팠고 끝내 병을 이기지 못했다. 세 살이면 지금 우리 애랑 같은 나이다. 아이는 근 한 달째 감기를 달고 살다가 얼마전에 병원에서 중이염 진단을 받았다. 항생제 처방이 나왔다. 안 그래도 항생제를 오래 먹었는데 열흘은 더 먹어야 한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고작 항생제에도 그런데 저렇게 조그만 애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 때, 그러다 결국엔 멀리 떠나버렸을 때 그 부모는 가슴이 도대체 몇 번이나 철렁이고 몇 미터가 내려앉았을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제 세월호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십수 년 애지중지 키운 아들딸을 마지막 인사도 못 하고 졸지에 하늘로 보낸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지. 감히 짐작해보자면 그 고통은 벌겋게 벌어진 상처투성이 몸으로 바다에 서서 거센 파도가 칠 때마다 상처가 쓸리는 아픔을 느끼면서도 그만 아프고 싶다는 마음을 먹는 것마저 죄스러워 차마 그 자리를 피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지 않을까.


아이를 낳고 더 많은 마음에 공감하게 된다. 아이가 주는 기쁨에 비례해 그 반대의 감정을 더 풍성히 상상하게 된다. 그런 감정에 풍성하다는 말이 어울리는진 모르겠지만. 아이는 키우는 사람의 마음의 저변을 넓힌다. 감정의 바다에 더 깊이 들어가게 한다. 그것은 좋기도 하고 꺼려지기도 하는, 피치못할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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