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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Sep 01. 2018

번역가는 포퓰리스트여야 한다

최근 출간된 정영목 번역가의 에세이집,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를 읽었다. 정 선배(친분은 없지만 이렇게 부르고 싶다)는 근 30년간 국내 출판 번역계를 지켜온 거목이다(책에서 느껴지는 성정에 비춰볼 때 본인은 이런 표현에 진저리를 칠 것 같지만). 이 책은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결코 말랑말랑하지 않다. 번역가로 살아가는 즐거움이나 고충 같은 개인적인 내용은 거의 배제하고 오롯이 자신의 번역론을 이야기한다.


내가 이해한 그의 번역론을 요약하자면, 번역은 원어와 우리말의 충돌을 과감히 받아들여 우리말의 외연을 확대하고 제3의 언어, 완전한 언어에 더 가까이 다가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원문의 표현법이 우리말에서는 생경한 것이라 그대로 옮겼다간 독자에게 가독성이 떨어지는 직역투 혹은 번역투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충돌의 위험성을 무릅쓰면서 번역으로 자국어의 영역을 확대하는 작업, 다른 언어와 우리 언어의 혼종에 의해 제3의 언어, 순수하고 절대적인 언어를 지향하는 작업"이 번역의 임무라고 주장한다. 반대로 원문의 표현을 우리 독자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윤색해서 "번역 같지 않은 번역"으로 읽히게 만드는 것은 자칫 "통속적인 한국어를 재생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으므로 "단순히 기능인"으로 머물고 싶지 않은 번역가라면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정 선배와 정반대로 번역가는 기본적으로 기능인이라고 생각한다(역시 책에서 느껴지는 그의 됨됨이에 비춰보자면 경력이 20년쯤 차이나는 까마득한 후배가 이렇게 이의를 제기한다고 고깝게 받아들이진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번역가는 고객에게 구체적인 의뢰를 받아 이행하고 보수를 받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번역가는 먼저 자유롭게 작품을 창작하고 나서 팔 사람을 찾는 예술가와 다르다.


그렇다면 번역가의 고객은 누구인가? 1차 고객은 출판사, 최종 고객은 독자다. 그렇다면 고객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번역서를 읽으면서 원어권 독자가 원서를 읽을 때와 똑같은 경험 내지는 최대한 유사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릴러 소설의 대가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는다고 해보자. 미국인 독자는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쉬지 않고 몰아치는 서스펜스에 취해 홀린 듯이 책장을 넘기지, '아니, 문장이 왜 이렇게 부자연스러워?',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게 우리말 맞아?' 같은 불평은 하지 않을 것이다. 문장을 잘 썼다고 감탄하면 감탄했지, 그것이 밥알 속에 섞인 돌멩이처럼 입안에서 걸리적거리지 않을 것이다.


킹의 작품을 번역서로 읽는 우리 독자가 원하는 것도 바로 그런 몰입의 경험이다. 걸리적거리는 문장 없이 온전히 작품이 주는 스릴에 빠져들기를 바란다. 최종 고객이 바라는 것이 그렇다면 1차 고객인 출판사가 원하는 것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고객은 원서가 애초에 원어권에서도 생경한 표현이 난무하는 글이 아닌 바에야 번역서도 자연스럽게 읽히기를 바란다.


물론 그저 우리말로 읽기 편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게 능사는 아니다. 요즘은 독자도 번역서를 보는 안목이 높아져서 우리말로 잘 읽히는 것은 기본이고 원문에 담긴 정보와 원저자의 문체 또한 고스란히 살린, 말하자면 원문에 착 달라붙어 있으면서도 입에 착 달라붙는 번역을 요구하는 분위기다.


한데 독자가 원하는 것은 딱 그 지점까지다. 거기서 더 나아가 번역가에게 우리말을 확장하기를 요구하는 독자는 설령 있다고 해도 드물다. 독자를 붙잡고 매끄럽고 편하게 읽히는 번역문과 조금 낯설지라도 우리말을 확장할 가능성이 있는 번역문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 전자를 택할 것이다. 이것은 독자들이 번역서를 비판할 때 문장이 어색해서 읽기가 어렵다거나 읽을 맛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주를 이루는 데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부러 낯선 표현을 써 가며 한국어의 외연 확대를 꾀하는 것은, 예술가의 자유로운 ‘창작’ 활동에서야 허용될지 몰라도, 고객의 요구 조건이 제법 명확하게 정해져 있고 타인의 창작물을 우리말로 '재현'하는 게 주된 임무인 번역에서는 월권이 될 수 있다. 회사로 치면 “김 대리, 예술은 집에 가서 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한 일이다.


또 한편으로 한국어의 표현법을 확장하는 게 과연 그렇게 인위적으로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번역을 통해 우리말에 정착한 외국어의 표현법이 얼마나 있는지 의문이다. 아니, 꼭 번역이 아니라도 어떤 개인이나 단체의 노력으로 새롭게 우리말에 편입된 표현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국립국어원에서 이미 수년 전부터 ‘우리말 다듬기’라는 명목으로 외래어, 한자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는 사업을 하고 있지만 그렇게 다듬어진 말이 실제 대중의 언어생활에 안착하지 못하고 대부분 사장된 것을 보면 언어란 게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외국어의 표현법'이란 단어의 차원을 넘어서는 구문을 뜻하므로 보통 한 단어를 일컫는 외래어와 구별해야 한다.)


이 언어란 생물을 움직이는 것은 어떤 고상한 목적을 가진 소수가 아니라 아무런 목적이 없는 대중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최근 우리말에서 새롭게 쓰이는 표현법 중에 '믿고 보는 OOO', '믿고 거르는 OOO'이란 말이 있다. 어떤 사람에 대한 전적인 신뢰 혹은 불신을 드러내는 말이다. 영화 번역계에서는 <데드풀> 번역으로 기막힌 번역 센스를 보여준 황석희 번역가가 관객들에게 '믿고 보는 황석희'라는 말을 듣는다. 출판 번역계를 보자면 여기서 말하는 정영목 선배가 편집자들에게 '믿고 맡기는 정영목'으로 통한다. (아직 출판계에 '믿고 보는 OOO'이라고 할 만큼 대중에게 인지도와 신뢰도가 높은 번역가는 없는 것 같은데…… 내가 한번 되어보겠습니다. 아직은 '듣보잡'이지만.)


이런 말은 누가 인위적으로 우리말에 집어넣은 게 아니다. 그 시초가 누구인지조차 모른다.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혹은 쓸 만하다고 여겨서 한 명 두 명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새로운 표현법으로 정착한 것이다. 이 과정에는 어떤 목적도, 인위적인 노력도 개입되지 않았고 구심점이랄 존재도 없었다. 그저 불특정 다수의 자유로운 언어생활이 그것을 잉태하고 성장시켰을 뿐이다.


새로운 표현은 그렇게 대중의 무수한 말길이 마구잡이로 만나는 바다에서 태어난다. 다시 말해 말의 생명은 대중성, 곧 통속성에서 나온다. 말은 통속성에 살고 죽는다. 그리고 오로지 그 말이란 것만으로 만들어지는 게 번역이다. 따라서 번역에서 통속성을 멀리하며 어떤 순수하고 절대적인 제3의 언어에 가 닿고자 하는 것은 바다에서 뭍으로 나온 고래가 바다를 등지고 새로운 터전을 찾아가는 것과 같다. 그것은 설사 가능하더라도 무척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독자가 번역가에게 요구하는 것도 그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게 아니다. 독자는 자신들이 놀고 있는 바다에 번역가가 원문의 바다에서 잡아온 고래를 산 채로 데려오기를, 그 펄떡이는 생명체를 자신들도 보고 만질 수 있게 해주기를 원한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이미 있는 생명체를 우리의 풍토에 맞게 재생해내라는 요구다. 따라서 외국어를 보고 만든 어떤 새로운 표현법으로 우리말을 확장시키겠다는 창조 의지가 지배하는 번역은 웬만해서는 고객을 만족시키기가 어렵고, 고객의 돈을 받고 일하는 입장에서 고객을 실망시키는 사람은 웬만해서는 시장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정 선배는 그런 것을 추구하면서도 28년이란 세월을 번역가로 버텨오지 않았느냐? 그렇다는 것은 시장이 그의 번역론에 손을 들어줬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이에 대한 내 대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정 선배가 웬만한 사람이 아니어서 가능했을 뿐이다. 내가 볼 때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낯섦과 대중이 원하는 자연스러움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탈 줄 아는 실력자다. 그게 타고난 능력인지, 지난 세월 동안 쌓은 내공의 힘인지는 딱 잘라 말하기 어렵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결코 웬만하다고 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그리고 정 선배가 이 일을 시작한 90년대는 상대적으로 번역가가 귀했고 번역을 대하는 독자들의 태도가 지금보다 너그러웠다는 점도 시장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고 그 시절에 번역가로 사는 것이 지금보다 수월했으리란 말은 절대 아니다. 똑같은 분량의 번역문을 만들어내기 위해 요구되는 수고의 분량만 놓고 본다면 첨단 기술의 혜택을 입은 현재의 번역가들이 훨씬 윤택한 시절을 살고 있다.)


정비어천가가 되기 전에 어서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정 선배와 반대되는 내 번역론의 핵심은 기본적으로 번역가가, 적어도 출판 번역가는, 대중을 고객으로 하는 기능인인 만큼 대중이 원하는 매끄러운 문장을 만드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앞에서 말했듯이 그냥 매끄러운 문장이면 안 되고 원문의 내용과 문체를 잘 살린 문장이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하지만 어쨌든 대중 번역가는 '대중에 영합하는' 언어를 써야 한다. 그것을 초월하는 언어를 추구하는 것은 대중에게 대중성을 인정받아 '믿고 보는 OOO'가 된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번역가는 '포퓰리스트'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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