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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Sep 26. 2018

출판사의 변심

지난 주 초에 에이전시에서 전화가 왔다. "번역가님, 반갑지 않은 소식이에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무슨 소식일지 딱 감이 왔다.


얼마 전에 모 출판사에서 에이전시를 통해 내게 작업을 의뢰했다. 예전에 자기계발서를 몇 권 같이 작업한 출판사였고 이번 책도 자기계발서였다. 마침 일정도 맞고 내용도 재미있어서 딱히 고민하지 않고 하겠다고 했다. 원래도 나를 콕 집어서 의뢰가 들어오면 과학이나 수학처럼 고등학교 때 배운 지식마저도 까먹고 문외한이 되어버린 분야의 책이 아니라면 수락하는 편이다. 자꾸 뺀찌를 놓으면 뺀찌를 놓을 기회마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이 겪어봐서 잘 알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렇게 같이 작업을 하기로 했는데 출판서에서 계약서를 쓰기 직전에 철회를 했다는 게 그 반갑지 않은 소식의 정체였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출판사에서 내가 예전에 받았던 번역료를 생각하고 의뢰했다가 최근에 오른 번역료를 알고는 일반적인 자기계발서에 그 정도 돈을 쓸 수는 없다고 물러선 것이었다. (아, 오해 마시길. 내 번역료는 올라봤자 쥐꼬리 만큼 올랐으니까.)


지금껏 10년 정도 번역 일을 하면서 이렇게 출판사에서 먼저 의뢰해 놓고 계약 직전에 뺀찌를 놓은 적이 몇 년 전에 또 한 번 있었다. 그때는 어느 작은 출판사에서 기획한 책이었는데 원래 모 유명 번역가에게 작업을 맡기려 했으나 그쪽에서 그 정도 단가로는 곤란하다고 해서 에이전시를 통해 내게 의뢰가 들어왔다.


그래서 내가 하기로 다 얘기가 됐는데, 이튿날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와서 그 유명 번역가가 책이 워낙 좋아서 그 단가로라도 해주겠다고 마음을 바꾸자 출판사가 그쪽과 계약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야심차게 준비한 책을 기왕이면 이름 있는 번역가에게 맡기고 싶은 출판사의 사정은 이해가 갔지만, 세상에서 제일 치사한 게 준 거 도로 뺏어 가는 거라고,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에이전시에서 대신 미안하다고 했지만 사실 출판사의 변심을 에이전시가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쪽도 피해자라면 피해자였다.


이번에도 역시 에이전시에서 미안하다고 하기에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괜한 말이 아니라 애초에 별로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일단은 출판사에서 문제를 삼은 게 나라는 번역가가 아니라 그 책의 가치였기 때문이다. 내가 그 정도 돈을 받을 자격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그 책이 그 정도 돈을 투입할 만한 책이 아니라는 게 출판사의 입장이었다. 다시 말해 나를 저울질한 것은 아니었다.


두 번째 이유는 올초에 번역료가 올랐을 때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어느 정도 예상했기 때문이다. 출판사에서는 모든 책에 최대한의 자원을 투입하지 않는다. 될 만한 책에는 큰돈을 들여도 고만고만한 책에는 고만고만한 돈 밖에 못 들인다. 많이 안 팔릴 게 빤한데 거액을 들이면 손해를 면하기가 어려우니 그럴 수밖에 없다. 방송으로 치면 <생생정보통>을 촬영하는데 유재석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내가 유재석급 번역가도 아니고 내 이름이 붙는다고 책이 더 팔리지도 않는다.


출판사에서 자원을 얼마나 투입할 용의가 있느냐에 따라 책의 급수를 매긴다고 할 때 급수가 높아질수록 거기 속하는 책의 절대적인 수는 줄어든다. 출판사 재정이 무한하지 않으니까 큰돈을 들일 수 있는 책의 수에는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번역료가 오르면 내게 들어올 수 있는 책의 절대적인 수가 줄어들 수 있다. 예전 같았으면 내게 올 수 있었을 수많은 책에 작별을 고해야 한다. 자칫하면 일감이 줄어들 위험이 있다.


그래도 괜찮다. 왜냐하면 번역료가 오른 만큼 예전보다 적은 노동으로 그때와 똑같은 수입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번역료가 장당 3,500원일 때 300만 원을 벌려면 857장을 번역해야 하지만, 번역료가 약 15퍼센트 올라 4,000원이 되면 750장만 번역해도 300만 원을 벌 수 있어 필요한 노동력이 약 12퍼센트 절감된다.


그리고 번역료가 오른다는 것은 그만큼 출판계에서 내 등급이 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전의 내 등급에서는 받지 못했을, 출판사에서 제법 좋은 성적을 기대하고 돈을 제법 많이 투자할 의사가 있는 책이 이제는 내게도 들어올 수 있다. 번역가로서 고만고만한 책을 여러 권 작업하는 것보다는 대박까진 아니어도 중박을 칠 만한 책을 한 권 번역하는 게 독자와 출판사에 이름을 알리는 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여하튼 이런 이유로 딱히 화가 나진 않았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타격이 없진 않았다. 의뢰가 들어온 후로 "좋아, 뒤에 재미있는 책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번 작업 빨리 끝내고 어서 다음 작업 들어가자" 하는 마음으로 속도를 냈는데, 그 다음 책이 빠져버리자 덩달아 의욕도 쪽 빠져버린 것이다. 더욱이 명절을 앞둔 시기에 그렇게 되니까 마음이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져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일을 많이 하는 게 아니라 되도록 일을 적게 하고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번역료가 오르는 것은 설령 당장 일이 줄어든다고 해도 긍정적인 변화가 아니겠는가.


참고로 몇 년 전의 그 책은 내가 알기로는 시장에서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다. 출판사에는 미안한 말이지만, 아니, 내가 출판사에 미안할 건 없지만, 나를 버리고 가신 책이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 것을 내 고향에서는 '꼬시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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