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하이라이트 Oct 02. 2018

번역가의 버팀목과 욕받이

번역가가 혼자 일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에게는 믿음직한 동료와 욕을 바가지로 먹어도 싼 동료가 있다. 공교롭게도 그 둘은 비슷한 직종이다. 먼저 번역가에게 좋은 동료는 출판사 편집자다. 편집자는 번역가를 선정해 작업을 맡기고 번역가가 납품한 원고를 다듬는다. 말하자면 번역가에게 일을 주고 뒤처리를 해주는 사람이다.


나는 편집자를 믿고 번역에서 완벽을 추구하지 않는다. 애초에 완벽이란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하는 나는 이 정도면 돈 받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했다, 하고 적당히 만족하는 수준을 목표로 삼는다. 좀 미진한 부분은 어차피 편집자가 보완해줄 것이라 믿는다.


그 미진한 부분이란 일단 어색한 문장을 꼽을 수 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글 쓰는 사람도 자기 글에서 잘 읽히지 않는 부분을 다 잡아내진 못한다. 글이란 게 보면 볼수록 고칠 부분이 생긴다고 하지만 반대로 보면 볼수록 눈에 익어서 이상한데도 이상하게 안 보이는 부분도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남이 고쳐줄 수밖에 없고 편집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렇다고 내가 날림으로 번역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여러 편집자에게 "편집자 고생 안 시켜서 좋다"는 말을 들었다. 다만 번역의 금자탑을 세우겠다고 심신을 축내지 않고 내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 번역가가 놓칠 수 있는 부분은 역주와 관련되어 있다. 번역가가 그 나름으로 목표 독자를 상정하고 번역을 하지만 그래도 독자의 수준을 제대로 짚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면 우리 독자 중 대부분에게 낯선 내용을 역주의 형식으로 보충 설명해주지 않고 그냥 넘어가버리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최근에 <마이크로트렌드X>라는 트렌드서를 번역했는데 아무래도 미국인의 시각에서 최신 트렌드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보니 우리 독자에게는 생소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그렇다고 미국인만을 위한 책은 아니고 한국과 관련된 트렌드를 포함해 한국인이 공감할 만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나도 친절하게 역주를 단다고 달았는데 나중에 역자 교정용 원고를 보니 편집 과정에서 추가된 주석이 여러 개 있었다(이것은 원래 편집자주라고 하는 게 옳지만 편의상 역주로 싣는 게 보통이다).


읽고 보니 그래, 우리 독자에게는 이런 것도 낯설 수 있겠구나, 싶었다. 내가 미국인은 아니지만 직업이 직업인지라 미국 사회와 문화에 일반적인 한국인보다는 좀 더 익숙하다 보니 그런 부분을 놓칠 때가 있다. 그럴 때 수습해주는 사람이 바로 편집자다.


물론 수습 과정에서 편집자와 번역가 사이에 마찰이 생길 수도 있다. 이를테면 편집자가 읽기 좋게 문장을 다듬다가 원문의 뜻에서 벗어날 때가 있다. 이런 것은 보통 역자 교정 단계에서 잡힌다. 교정쇄를 원문과 일일이 대조하며 읽는 것은 아니라도 이미 원문과 번역문을 수 차례 읽은 번역가의 눈에는 이상한 부분이 쉽게 포착된다.


오역 외에 표현의 문제도 있다. 번역가가 평소에 일부러 쓰지 않는 표현을 편집자가 쓰는 경우다. 예를 들어 나는 '때문에'를 접속사로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남자다. 때문에 치마를 안 입는다" 같은 문장은 엄밀히 말해 바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번역 원고가 편집 과정을 거쳐서 돌아오면 이런 표현이 들어가 있기도 하다.


예전에는 이런 것을 꼬박꼬박 지적했다. 하지만 지금은 편집자의 재량을 인정하는 편이다. 편집자도 나만큼 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고 날마다 일선 현장에서 뛰는 사람인만큼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하고 웬만한 것은 그냥 수용한다. 뭐, 연차가 쌓이면 깐깐한 번역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그렇다.


이것이 번역가의 좋은 동료인 편집자에 대한 이야기다. 편집자는 번역가가 믿고 기댈 언덕이 된다.


그렇다면 번역가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어도 싼 동료는 누구인가? 그 역시 편집자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나라가 아니라 저쪽 나라의 편집자, 그러니까 원서의 편집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말했듯이 편집자는 번역가가 미쳐 챙기지 못한 부분을 보완해주는 사람인데 이것은 작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문장이 이상할 때 읽기 쉽게 수정하고 내용의 흐름이 이상할 때 덧붙일 부분은 덧붙이고 뺄 부분은 빼서 부드럽게 읽히게 만드는 게 편집자의 역할이다(물론 편집자가 독단적으로 할 일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작가와 상의를 거쳐야 할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은 좋은데 글솜씨가 부족해서 글을 개차반으로 썼으면 편집자가 작가를 보조하든 닦달하든, 아니면 원고를 죄 뜯어고쳐서든 간에 하여튼 독자가 읽을 만한 글로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런데 번역을 하다 보면 편집자가 제 역할을 다 하지 않은 문장, 문단, 책을 꽤 많이 만난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난삽한 문장이 마구잡이로 나오는 책, 문단 중간중간에 생뚱맞은 문장이 튀어나와 논리적 흐름을 깨고 이해를 방해하는 책이 의외로 많다. 말하자면 눈을 부릅뜨고 읽는데 머릿속에서 깜빡깜빡하는 문장이 많이 나오는 책이 있다.


방금 읽은 문장, "눈을 부릅뜨고 읽는데 머릿속에서 깜빡깜빡하는 문장이 많이 나오는 책이 있다"가 무슨 뜻인지 퍼뜩 이해가 가는가? 문맥상 어떤 의미인지 대충 감이 잡힐지 몰라도 정확히 무슨 뜻이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런 문장이 어쩌면 독자의 입장에서는 크게 문제가 안 될 수 있다. '아, 문장이 잘 이해가 안 간다는 뜻이구나' 하고 넘겨짚어도 괜찮다. 나도 독자로서 책을 읽을 때는 그냥 그렇게 넘어간다.


하지만 번역가의 입장에서는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정확한 번역이 불가능하니 큰 골칫거리다. 보통은 몇 번씩 문장을 곱씹고 머릿속에서 해체하고 재조립하기를 반복한 후에야 "눈을 부릅뜨고 집중해서 읽는데도 머릿속에서 의미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문장이 많이 나오는 책이 있다"라고 풀어서 번역할 수 있다.


이건 원래 편집자가 해야 할 일이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작가가 문장을 이상하게 썼으면 편집자가 바로잡아 놓아야 한다. 근데 그걸 번역가인 내가 떠안게 되면 성질이 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작업 시간이 아니라 작업량으로 돈을 받기 때문이다. 당연히 같은 시간을 투입하면 되도록 많은 문장을 번역하는 게 이익이고, 반대로 한 문장을 10~20분, 혹은 그 이상으로 붙들고 있으면 그만큼 손해다. 내가 지식이 부족해서 그러는 것이면 나를 탓할 일이지만 글이 이상하게 쓰인 게 문제면 속이 탄다.


그나마 어쩌다 한 번씩 저런 문장이 나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게 자꾸 반복되면 결국 "야이, 편집자 새끼야, 니는 이게 이해가 되냐!?"라는 일성이 터진다. 거기서 더 나가면 작가에게든, 편집자에게든 "씨바, 글 한번 줘까치 썼네!"라는 폭언도 서슴지 않는다. 물론 골방에서 나 혼자 하는 소리다. 어차피 일면식도 없고 앞으로 나와 마주칠 확률도 희박한 외국인한테 들리지도 않을 욕 좀 한다고 뭐 대수인가. 그 정도는 해줘야 나도 스트레스가 좀 풀리지. 편집자로서 직무를 유기한 자는 욕을 먹어도 싸다.


그리고 이렇게 욕을 한 사발 퍼붓고 나면 또 측은지심이 든다. 적어도 작가에게는 동정심이 생긴다. 분명히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있는데 그걸 글로 표현할 능력이 부족하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래서 내가 번역가로서 그의 생각을 좀 더 명확한 표현으로 풀어줘야 한다는 이타심이 생긴다. 그게 꼭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내 나름으로는 애를 써본다.


물론 이해가 안 가는 문장이 나올 때마다 작가에게 연락해 답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이고, 번역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시점에서 통 이해가 안 가는 문장에 한해서만 작가에게 이메일로 정확한 의미를 묻는다. 다만 그것도 반드시 답장을 받는다는 보장은 없다. 어쨌든 이렇게 번역가에게 자기 일을 떠넘기고 고생시키는 편집자는, 어휴, 아니다, 그 사람도 나름 사정이 있었겠지.


여하튼 이것이 혼자 일하는 것 같아도 사실은 혼자가 아닌 번역가의 동료에 대한 이야기다. 편집자는 든든한 버팀목으로서든 욕받이로서든 존재감을 발휘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출판사의 변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