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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Oct 16. 2018

번역가의 자기관리

번역가는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혼자서 일한다. 역으로 생각하면 누구의 관리도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출판사도 웬만해서는 마감일 전에 번역 진도를 묻지 않는다. 번역가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리라고 생각하는 게 이쪽 업계의 관례다. 이렇게 타인의 관리를 받지 않는 만큼 번역가에게는 자기관리가 생명이다.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잘 관리해야 한다. 1) 시간. 2) 파일. 3) 건강.


1. 시간 관리

번역가가 절대로 어기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마감일이다. 번역가가 약속된 날짜에 원고를 넘기지 않으면 그 책의 출간 일정 자체가 틀어져버린다. 번역가가 지연시킨 시간 만큼 편집 과정에서 쓸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거나 출간일이 뒤로 밀려난다. 당연히 출판사로서는 난처하고 기분 나쁜 일이고, 기본적인 약속을 지키지 않는 번역가에게 다시 일을 줄 리 만무하다.


마감일을 지키려면 날마다 꾸준히 일해야 한다. 프리랜서라고 하면 일하고 싶을 때만 일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래서는 마감일을 못 지킨다. 보통 책 1권을 2~3개월 일정으로 계약한다. 이것은 되도록 주 5일, 최소한 주 4일은 꼼짝 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야 소화 가능한 분량이다.


학창 시절에 방학이 길다고 숙제를 미뤘다가 막판에 똥줄이 탔던 경험이 다들 있을 텐데 번역도 마찬가지다. 일단 오늘은 놀고 내일 해야지 하다 보면 그만큼 마감 직전에 고생한다. 그리고 방학 숙제와 달리 못 해도 몇 대 맞고 끝나는 게 없다. 마감을 못 지키면 실격, 마감은 지켰지만 막판에 벼락치기로 한다고 날림으로 번역을 했어도 실격이다. 살 길은 날마다 꾸준히 일하는 것밖에 없다.


꾸준히 일하는 것에 더해 대략적으로 하루에 어느 정도 분량을 번역해야 하는지 계산이 서 있어야 한다. 내 경우에는 하루에 보통 원서 기준으로 8페이지 정도를 번역하면 퇴고에 들어가는 시간까지 감안해서 무리 없이 마감을 맞출 수 있는 수준이다.


아울러 주기적으로 진척도를 확인하면 좋다. 나는 전체 일정에서 50퍼센트가 지난 시점에 남은 분량을 확인하고 마감 2주 전에 또 한 번 확인해서 속도를 그대로 유지해도 되는지 재본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나도 솔직히 말하자면 마감일을 어긴 적이 두 번 있었다. 한번은 그냥 위장병인 줄 알고 응급실에 갔는데 난데없이 담낭(쓸개)을 제거해야 한다고 해서 보름쯤 입원하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퇴원 후 에이전시를 통해 사정을 말하니 출판사에서는 이 쓸개 빠진 자를 위해 흔쾌히 마감일을 보름 연장해줬다.


또 한번은 올초의 일이다. 번역 의뢰를 받은 시점에서 원서의 원고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가편집본은 나와 있었는데 그 분량이 350쪽 정도라 두 달 반 정도 일정으로 계약을 했다. 한데 일정이 반쯤 지난 시점에서 완성된 편집본을 받아보니 분량이 400쪽을 훌쩍 넘겼다. 어떻게 된 일인가 하면 가편집본은 그냥 워드 파일을 PDF로 전환한 수준이라 실제 출간본보다 한 쪽에 들어가는 글의 양이 더 많았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번역 속도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약속된 일정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판에 가서 미국 정치와 관련된 내용이 마구잡이로 쏟아지니까 이것저것 조사하고 공부해 가며 번역한다고 작업 속도가 거의 반토막이 나 버렸다. 덕분에 미국 정치 제도에 대해 어디 가서 아는 척 좀 해도 될 정도로 지식을 습득하긴 했지만 도저히 약속된 일정에 번역을 마무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출판사에 미리 연락해서 일단 마감일까지는 본문만 넘기고 주석 부분은 사나흘의 말미를 더 받기로 했다. 그리고 보름 동안 거의 하루에 12~14시간씩 작업하는 강행군 끝에 약속된 날짜에 본문을 마감하고 며칠 후 나머지 부분도 완성해서 납품할 수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매번 마감을 칼 같이 지켰다고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나마 이 정도면 인간적인 느낌을 주는 수준에서 선방한 게 아닌가 하고 자위해본다.


2. 파일 관리

번역가는 보통 중간 원고를 넘기는 일 없이 마감일에 통째로 원고를 납품한다. 최소 2개월 치 작업물을 한 번에 인도하는 것이다. 만약 2개월 일정으로 계약을 맺었는데 1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그간 작업했던 원고가 날아가버리면 남은 1개월 동안 2개월 치 작업을 몰아서 해야 한다.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려면 작업 파일을 잘 간수해야 한다. 다시 말해 백업을 잘해야 한다.


나는 일단 원고를 통째로 한 파일에 저장하지 않는다. 챕터별로, 작업 단계별로 파일을 나눈다. 예를 들면 1장.1차검토.hwp 형식으로 저장한다. 이렇게 하면 혹시 한 파일이 손상되더라도 전체적으로 볼 때는 피해가 크지 않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모든 파일을 드롭박스에 저장한다. 이런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하면 혹시라도 실수로 파일을 삭제하거나 잘못 건드려서 내용이 날아갔다 해도 복원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나는 맥을 사용하기 때문에 맥 자체의 타임머신이라는 기능을 통해 주기적으로 하드디스크의 모든 파일이 백업된다. 백업중독자인 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모든 파일을 메일함과 네이버 클라우드에까지 저장한다.


이렇게 거의 강박에 가깝게 백업을 해 두기 때문에 중간에 자료가 유실될 일이 없다. 누가 내게 악감정을 품고 자료를 몽땅 날려버리려 해도 일단 내 컴퓨터에 침투해 파일을 삭제하고, 드롭박스, 메일 계정, 네이버 계정까지 싹 다 해킹해야 한다. 더욱이 나는 백업병만 있는 게 아니라 보안병까지 있어서 그런 파괴 공작이 쉽진 않을 것이다.


3. 건강 관리

번역가는 주로 혼자 일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종일 일어나지도 않고 앉아 있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면 건강 망치는 건 일도 아니다. 특히 허리, 목, 어깨가 쉽게 망가진다. 몸이 안 좋으면 좋은 글이 안 나온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번역은 정신력으로 하는 일이지만 정신력도 체력이 뒷받침이 돼야 나오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25~30분마다 한 번씩 스트레칭을 한다. 스트레칭이라고 별 거 없다. 그냥 양팔을 직각으로 세워서 등 뒤에서 어깨뼈가 서로 붙는다는 느낌이 들 만큼 당긴 다음 고개를 쭉 뻗어주는 동작만 10초 정도 한다. 이건 서울대병원 재활의학과의 정선근 교수가 목 건강을 위해 권하는 스트레칭이다. 나한테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시사인> 기사 참고)


이렇게 수시로 스트레칭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일주일에 3번 정도 운동을 간다. 원래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작년에 이사 온 아파트는 걸어서 5분 거리에 자체 헬스장이 있고 신축이라 시설도 깨끗한 데다 낮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럭저럭 운동할 맛이 난다. 가서 뭐 대단한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러닝머신 위에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살짝 빠른 속도로 30분쯤 걷고(뛰면 발목과 뒤꿈치에 무리가 잘 가는 체질이라) 상체 운동 기구 4개를 3세트씩 이용하고 온다. 상체 운동 기구는 어깨, 가슴, 등, 허리 근육을 단련하는 것이라 번역가에게 딱이다. 하체도 하면 좋겠지만 그것까지 하면 귀찮아서 아예 안 갈까 봐 딱 상체에서 기분 좋게 끝내는 게 내가 꾸준히 운동을 가는 비결이다.


이처럼 간단한 스트레칭과 규칙적인 운동을 시작하고는 만성적인 어깨통증이 거의 다 사라졌다. 예전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어깨가 무겁고 목을 조금만 돌릴라 쳐도 어깨가 당겼는데 지금은 주말에 미친 듯이 게임을 하고 났을 때면 모를까, 일하는 것 때문에 그런 통증을 느끼진 않는다.


앞에서 마감을 앞두고 하루 12시간 이상씩 일했을 때 내 몸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도 다 운동 덕분이었다. 운동을 한 다음 날은 몸이 쌩쌩한데 하루를 쉬면 축축 처지는 게 확연히 느껴져 날마다 헬스장에 안 갈 수가 없었다.


나는 헬스장이 가까우니까 헬스를 하지만 그밖에 수영이나 요가처럼 상체를 풀어주는 가벼운 운동도 좋을 것 같다. 물론 기왕이면 전신을 다 풀어주고 단련시키는 운동이 제일 좋겠지만.


이상이 번역가로서 나의 자기관리법이다. 써 놓고 보니 그리 대단치는 않다. 하지만 원래 대단치 않은 것이 쌓여서 대단한 성취든 실패든 일어나는 법이다. 지금은 대단한 번역가가 아닐지라도 언젠가 그런 사람이 될 때까지 장기간 버티려면 시간, 파일, 건강은 꾸준히 관리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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