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 한 장을 채우는 비결
A4는 광활하다. 내 생각은 더 광활하다.
—김고명
빈 종이(혹은 빈 화면) 앞에서 많은 사람이 쫀다. 무엇으로 그 공간을 채워야 할지 모르겠다는 막막함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안 쫀다. 그깟 종이 몇 장쯤은 얼마든지 씹어먹을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채울 수 있다.
왜냐하면 한번 풀어놓으면 신나서 흘러나오는 것이 생각이기 때문이다. 일단 첫 문장으로 물꼬를 트면 생각이 줄줄 나온다. 그래서 종이를 채우는 건 쉽다. 어려운 건, 아니, 귀찮은 건 그렇게 종이 위에 흘려놓은 생각들을 읽기 좋게 정리하는 퇴고 과정이지.
여하튼 종이를 채우긴 쉽다. 우리 안에는 무수한 생각이 존재하고 언제든 기회만 있으면, 혹은 툭 건드리기만 하면 튀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글을 쓸 때 막막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 생각을 풀어놓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첫 문장을 무엇으로 쓸까 한참 고민하다 썼다 지웠다 다시 쓰기를 반복한다. 첫 문장에서부터 생각이 막혀버린다.
첫 문장을 어찌저찌 통과했더라도 생각이 흘러나오면 다시 주워담기 바쁘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때문이다. 문장이 맞춤법에 맞는지 따지고, 표현이 적절한지 따지고, 멋있는지 따지고, 그 생각이 진짜 내 생각인지 따지고, 앞문장에서 뒷문장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지 따지고, 사회의 통념에 맞는지 따지고, 타인에게 보여주기 부끄럽거나 두렵진 않은지 따지고, 또 이걸 따지고 저걸 따지고, 그러면서 자꾸 지우고 자꾸 앞에 쓴 문장을 보고 때로는 문단을 통째로 날려버리기도 한다.
그러면 생각은 나오다가 기분이 나빠서 다시 들어가버린다. 이렇게 한번 토라진 생각을 다시 끄집어내긴 쉽지 않다. 생각은 본래 자유로움을 좋아하는데 나오라고 할 땐 언제고 자기를 싹둑싹둑 자르고 다시 머릿속에다 쑤셔넣으니 삐쳐서 머릿속 문을 쾅 닫아버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생각을 어떻게 끊지 않고 흘러내보낼 수 있을까? 좋은 훈련법이 있다. 바로 모닝 페이지다. 모닝 페이지는 줄리아 캐머런의 《아티스트 웨이》에 소개된 창의력 개발법인데 방법은 간단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책상 앞에 앉는다.
A4용지에 생각나는 대로 글을 적는다.
A4용지를 두 장 채운다.
이때 중요한 원칙이 있다. 절대로 글을 물리지 말 것. 다시 말해 지금 쓰는 문장이 안 되는 것 같다고, 맞춤법이 틀렸다고, 그 내용이 너무 부끄럽거나 비윤리적이라고, 여하튼 어떤 이유로든 되돌아보고 지우면 안 된다. 손을 멈추지 않고 생각이 불러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적는다는 느낌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위의 ‘광활함’에 대한 인용문도 내가 오늘 모닝 페이지에서 건진 것이다. 오늘 나는 십여 년 만에 모닝 페이지를 시작했다. 이십 대의 마지막에 몇 달간 쓰고 마흔둘을 앞둔 지금 《파이브 저널》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자극을 받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아침에 A4 두 장을 채우는 것은 시간상 어려워서 한 장만 채우기로 했다. 그것도 리갈패드에 쓰고 바로 찢어서 세절해버리기로. 마구잡이로 나온 생각을 굳이 다시 읽을 필요는 없고 또 혹여나 다른 가족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장벽이 되어 솔직한 생각의 흐름을 방해할 것 같아서다.
이 모닝 페이지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 생각을 풀어놓는 능력을 기하급수적으로 증진시킨다. 나는 이십 대 끝물에 몇 달간 모닝 페이지를 쓰고 앞에서 말했듯이 빈 종이 앞에서 느끼는 막막함이 사라졌다.
해보면 안다. A4가 아무리 광활하게 느껴져도 우리 안에는 그보다 더 광활한 생각이 들어 있다는 것을. 더욱이 꾸준히 읽고 쓰는 사람이라면 매번 지식이 쌓이고 생각이 더해지니 머릿속의 지평이 얼마나 넓은지 가늠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글이 원고지로 계산하면 10장으로 A4 한 장을 살짝 넘는 분량인데 다 채우는 데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아침에 글감을 정했더니 하루를 보내는 동안 틈틈이 내용에 대한 아이디어가 (저절로) 떠오른 게 도움이 됐긴 해도 예전의 나였다면 족히 한 시간은 붙잡고 있었을 분량이다. 이게 다 생각 풀어놓기 훈련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