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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Dec 31. 2022

올해의 책 2관왕 번역가의 조언

기어이 출판번역가로 살겠다면

이 영광을 문장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책상을 내리치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던 제 주먹에게 돌리겠습니다.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올해의 책 2관왕을 차지한 소감이다. 2022년에 출간된 역서 4권 중 다음 2권이 언론사에서 뽑은 올해의 책에 선정됐다.


《노동자 없는 노동》(필 존스, 롤러코스터, 2022년 11월): 《한겨레》 올해의 책 번역서 부문 10권 中

《배움의 기쁨》(토머스 채터턴 윌리엄스, 다산책방, 2022년 2월): 《매일경제》 올해의 책 문학·에세이 부문 5권 中


나는 어떻게 올해의 책을 1년에 2권이나 배출하는 번역가가 됐을까? 물론 운이 좋았지. 하지만 그 운을 활용하는 것도 실력이니까 나름의 비결을 풀어보자면……






1. 나의 존재와 실력을 꾸준히 알린다

위의 두 책은 어떻게 내게 맡겨졌을까?


《노동자 없는 노동》은 롤러코스터 출판사와 두 번째로 작업한 책이다. 롤러코스터 출판사와 인연을 맺는 데는 이전에 번역한 책으로 플랫폼 노동의 명암을 조명한 《직장이 없는 시대가 온다》(새라 캐슬러, 더퀘스트, 2019년 2월)가 연줄이 됐다. 《배움의 기쁨》은 평소 내 브런치의 독자였던 편집자가 나라면 원문의 느낌을 잘 살릴 수 있으리라 판단해 의뢰했다.


출판번역은 빈익빈부익부다. 역서가 많고 이름이 난 사람일수록 책이 몰린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역서를 많이 내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어지간해서는 의뢰를 거절하지 않는다.


역서만 다가 아니다. 어떤 경로로든 꾸준히 나를 드러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브런치와 인스타그램에 꾸준히 글을 쓴다. 나를 아는 편집자를 단 한 명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서.






2. 돈은 생각하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출판번역은 공을 들일수록 벌이가 줄어드는 직업이다. 번역에 들인 시간이 아니라 결과물, 즉 번역 원고의 분량을 기준으로 보수가 지급되기 때문에 같은 시간에 되도록 많은 문장을 번역하는 게 이득이다.


하지만 나는 괜한 욕심에 돈 생각 안 하고 문장에 공을 들인다. 


《노동자 없는 노동》은 번역 원고의 분량이 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600매, 《배움의 기쁨》은 900매다. 속도를 내면 한 달 만에 번역 가능한 양이다. 하지만 나는 두 권 다 석 달 넘게 붙들고 있었다. 번역과 육아를 병행하기 때문에 시일이 더 걸린 점을 감안하더라도 속도가 더뎠다. 원문이 만만치 않아 그만큼 신경 써야 했기 때문이다.


《노동자 없는 노동》은 문명의 이기로 여겨지는 자동화의 이면에서 푼돈을 받고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하는 책이다. 노동연구자인 저자는 "너네 《자본론》은 당연히 읽었지?"라는 전제를 깔고 논의를 전개한다. 주로 저개발국가의 노동 착취 사례를 든다. 그런데 설명이 짧다. 즉, 사상적, 지리적, 문화적으로 문장과 문장 사이에 생략된 내용이 꽤 많다. 번역을 하려면 머릿속에서 그 공백을 다 채워야 한다. 그래서 자료를 조사하고 저자의 의도를 유추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더욱이 (학자들의 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인데) 저자가 압축된 표현을 쓰느라 한 번 읽어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여러 번 곱씹어야 했다.


《배움의 기쁨》은 흑인 사회에서 나고 자란 저자가 힙합에 경도된 흑인 문화의 폭력성을 상세히 묘사하며 본인이 독서와 배움으로 그 협소한 문화의 우물에서 벗어난 과정을 쓴 회고록이다. 당연히 힙합에 대한 지식이 기본이다. 그래서 힙합의 기초와 역사에 관한 책을 읽었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해 번번이 아티스트와 노래에 관한 자료를 조사해야 했다. 더군다나 1990~2000년대 흑인 청소년의 생활을 묘사하는 부분이 많아서 시대에 대한 조사도 필요했다.


가장 큰 난관은 곳곳에 나오는 힙합 가사였다. 한국어로도 라임을 살리고 싶었다. 나는 힙합에 문외한이었다. 그래서 매일 틈나는 대로 한국 힙합을 들었다. 매일 한 곡씩 가사를 필사했다. 한국인 래퍼가 쓴 랩 창작법에 관한 책도 정독했다. 그리고 가사 한 줄을 번역하는 데 길면 1시간 이상을 쓰기도 했다.


분명히 가성비가 떨어지는 작업 방식이다. 하지만 그런 수고가 있었기에 원문을 살리는 번역이 가능했고, 그래서 두 책의 가치가 심사자들에게 잘 전달됐을 것이라 생각한다.






3. 내 안에서 보상을 찾는다

돈 생각 안 하고 번역한다고 했지만 애초에 번역은 돈벌이가 안 좋은 직업이다. 속도를 내봤자 큰돈이 벌리지도 않는다. 빨리빨리 번역해도 큰돈 못 번다. 오죽하면 20년 경력의 조영학 번역가가 이렇게 한탄했을까.


“20년 동안 90권 넘게 번역을 했지만 지금도 한 달 수익이 200만원에 미치지 못한다. 그나마 제법 잘나간다는 내가 그럴진대 누가 이 일을 직업으로 삼으려 하겠는가. 날림 번역으로도 먹고살기 어려운 판에 어느 누가 소명의식을 갖고 작업에 임하겠는가.”

출처: <어느 날 번역가가 모두 사라진다면>, 《서울신문》 2021년 11월 15일


조영학 선배는 저 칼럼을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번역가로서 은퇴를 선언했다.


이런 판에서 돈 생각 안 하고 문장에 공을 들인다면 나중에 번역료 지급 내역을 보고는 자괴감이 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돈이라는 외부의 보상 말고 내면의 보상을 찾아야 한다.


내게 번역이 주는 보상은 두 가지다. 재미와 성장.


나는 번역이 재미있다. 특히 어려운 문장과 한참 씨름한 끝에 원문의 뜻과 스타일을 살리면서도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이 나오면 학창시절에 몇십 분씩 끙끙대며 골치 아픈 수학 문제를 끝내 풀어냈을 때와 같은 쾌감을 느낀다.


위의 두 권 중에서 번역하는 재미로만 치면 《배움의 기쁨》이 훨씬 앞섰다. 쌍욕이 수도 없이 등장하고 폭행과 성행위가 적나라하게 묘사되는 책이다. 인문, 자기계발, 경영서 위주로 번역하는 나로서는 평소 좋아하는 거친 소설을 번역하는 느낌이라 좋았다. 또 앞서 말했듯이 힙합 가사를 한참 고민한 끝에 제법 괜찮은 한국어 가사가 나올 때마다 짜릿했다.


재미 다음은 성장이다. 출판번역의 매력은 누구보다 책을 깊이 읽게 된다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100퍼센트에 가깝게 이해해야만 정확한 번역이 가능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책 한 권을 번역할 때마다 그 안의 정보와 통찰이 내게 고스란히 흡수된다.


《노동자 없는 노동》이 특히 그랬다. 이 책은 AI의 학습에 사용되는 데이터에 ‘고양이’, ‘횡단보도’, ‘가로등’ 같은 라벨을 붙이는 노동자를 비롯해 자동화의 이면에서 영혼을 갉아먹을 만큼 단순한 노동을 하며 겨우 입에 풀칠할 수준, 혹은 그 이하로 돈을 받는 ‘미세노동자’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밝힌다. 이 책을 번역하며 그간 의식하지 못했던 자동화의 어두운 면을 밝히 알게 됐을 뿐만 아니라, 나의 저작물, 즉 내가 쓰고 번역한 글 또한 AI의 학습용 데이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콘텐츠들이 번역 AI를 향상하는 데 사용된다면 결국 번역가라는 직업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렇잖아도 그 책을 번역한 직후 기계 번역 관련 프로젝트에 합류하지 않겠냐는 요청을 받았다. 하지만 바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이유로 거절했다. 아무리 자동 번역이 대세가 될 게 불보듯 뻔한 상황이라 해도 장기적으로 나와 동료들의 생계를 파괴하는 일에 참여할 수는 없으니까.


이렇게 번역을 할 때마다 나의 지식과 생각의 저변이 더욱 넓어진다. 책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을 성장시키고, 번역은 그 성장의 강도가 더 세다.


그래서 나는 어려운 책도 마다하지 않는다. 위의 두 책만 해도 미세노동과 힙합은 내가 잘 아는 분야가 아니라서 망설여지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항상 도전하는 마음으로 의뢰를 수락한다. 어렵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까.






4. 1~3은 사실 다 개소리다

이렇게 내가 수고해봤자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어차피 번역가는 작가의 그림자다. 위의 두 책만 해도 내용이 좋아서 올해의 책이 된 거지, 번역 잘했다고 뽑힌 게 아니다. 아무도 내게 선정됐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매일 내 이름으로 검색하는 습관이 없었다면 아마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번역가의 노고를 치하하는 상은 유영번역상을 빼면 전무한 실정이다. 그나마도 문학 번역만 취급하기 때문에 나처럼 비문학만 다루는 번역가는 애초에 고려 대상도 아니다.


어차피 상 받자고 번역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돈은 벌어야지. 그런데 나는 통장에 번역료가 입금될 때마다 성난 소처럼 콧김이 푹푹 나온다. 내가 고작 이 돈 받으려고 책상 앞에서 목과 허리를 망가뜨려 가면서 소처럼 고생했나 싶다. 그나마 나는 업계에서 번역 단가가 제법 높은 축에 속하는데도 이 모양이다. 내가 번역에 투입하는 시간을 생각하면 돈벌이로는 효율이 한없이 떨어지는 직업이다.


솔직한 말로 내가 이런 식으로 이 일을 얼마나 더 지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일을 15년이나 했더니 이젠 지친다.


아니, 당장 그만두겠다는 말은 아니다. 번역이 싫다는 말도 아니다. 가계에 한 푼이라도 더 보태려면 일을 그만둘 수는 없다. 그리고 번역은 여전히 재미있다.


다만 지금처럼 벌이를 생각하지 않고 품질을 고집하는 등신 같은 짓은 이제 그만둘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자꾸만 든다.






내가 번역을 배울 때 현직 번역가였던 김OO 선생님이 충고했다.


“고명 씨, 젊으니까 다시 생각해봐. 이거 돈도 명예도 안 따르는 일이야.”


만일 당신이 번역가가 되겠다고 말한다면 나도 똑같은 충고를 돌려줄 것이다. 물론 당신은 남들은 몰라도 당신은 할 수 있다고, 당신은 돈도 명예도 다 잡는 멋진 번역가가 될 것이라고 (속으로) 반박할 것이다. 나도 선생님 말을 들었을 때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쩌면 당신이 생각하는 그 멋진 번역가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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