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료를 올리는 비법
출판번역에서 번역료의 앞자리는 냉정하게 말해서 곧 그 번역가의 레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고지 1장당 3500원을 받는 번역가는 레벨3, 4300원을 받는 번역가는 레벨4, 5000원을 받는 사람은 레벨5인 거죠. 단, 이게 실력의 레벨은 아닙니다. 실력이 좋지만 번역료는 많이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무슨 레벨이냐. 바로 신뢰도의 레벨입니다. 출판사에서 얼마나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느냐 하는 거죠.
저는 최근에 3건의 작업을 장당 5000원에 계약했습니다. 출판번역계에서는 꽤 높은 금액이에요. 번역료로만 따지자면 업계 상위권이라 할 수 있죠. 어떻게 하면 이 정도 금액을 받을 수 있을까요?
마케팅에서 고객을 유치할 때 잠재고객이 가장 신뢰하는 경로는 ‘소개’입니다. 아는 사람이 “이 브랜드 써보니까 좋더라. 너도 써봐”라고 추천해주면 믿음이 가잖아요. 출판번역에서도 마찬가지예요. 편집자가 번역가를 선정할 때 가장 믿을 수 있는 방법이 지인의 소개입니다. 그래서 번역가 입장에서는 번역료를 올리기에 가장 좋죠.
저는 2008년 1월에 장당 3500원으로 시작해서 10년 가까이 3000원대를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러다 2017년 말에 그간 일로 알고 지내던 분에게서 전화를 받습니다. 모 출판사에서 중요한 책을 번역할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저를 추천해주셨다고요. 그러면서 그분이 귀띔을 해줬어요.
“여기 4000원 부르셔도 될 거 같아요.”
그래서 정말로 4000원을 불렀더니 출판사에서 흔쾌히 수락했어요. 그래서 레벨4 번역가로 도약했죠.
그리고 올해 들어서 10년쯤 전에 어느 모임에서 뵀던 선배 번역가님의 연락을 받았어요. 제 글을 보고 번역에 임하는 태도와 문장이 마음에 들어서 아는 출판사에 소개시켜주고 싶으시다고요. 그래서 슬쩍 여쭸습니다.
“선배님, 제가 지금 장당 4000원 중반대 받고 있는데 그 출판사에서 그 정도 줄 수 있을까요?”
제게 번역을 의뢰하려고 연락했다가 번역료가 비싸서 관둔 출판사들이 있어서요. 그랬더니 선배님이 웃으며 말씀하십니다.
“김 작가님 실력이면 장당 5000원도 가능하지.”
그래서 실제로 그 출판사와 장당 5000원에 계약했어요.
출판사는 항상 실력 있는 번역가를 찾아요. 그래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추천해주는 번역가라면 고액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죠. 그러니까 누가 나를 소개해준다고 하면 슬쩍 번역료를 얼마 정도 줄 수 있을지 물어보고 과감하게 질러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날 소개해줄 사람을 어떻게 만나냐고요? 글쎄요. 저도 따로 인맥 관리를 한 건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누구를 만날 때든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고 진정성 있게 대했다는, 다소 뻔한 말 말고는요.
그리고 지금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나도 실력 있는데 출판계에서 왜 몰라주는 걸까?’ 이제 그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왜 내 실력을 몰라주냐고요? 나란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니까요. 역서가 초대박이 난 경우가 아니라면 역서만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건 불가능해요. 한 달에도 신간이 수백 권씩 쏟아져나오는데 베스트셀러가 아니고서야 그중에서 돋보이길 바라는 건 무리죠.
그러니까 나란 번역가가 있다는 걸 적극적으로 알려야 해요. 어떻게? 쉬워요. 블로그나 SNS에 글을 쓰세요. “여기 번역가 있어요!”라고 외쳐야 해요. 그래야 편집자들이 알아봐요.
저만 해도 2017년에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인지도가 높아졌어요. 어떻게 아냐고요? 그전까지는 대개 에이전시를 통해 기존에 거래했던 출판사들의 의뢰를 받았는데 브런치를 시작한 후에는 이전에 거래한 적 없는 출판사들에서 직접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거든요. 그리고 브런치에 글을 쓴 것이 계기가 돼서 2020년에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해보고 싶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번역가의 습관에 대한 책을 출간한 후에는 그런 의뢰가 더 많아졌어요.
왜 그럴까요? 김고명이란 브랜드를 믿을 수 있으니까요. 내가 쓴 글과 책을 보면 번역에 임하는 태도와 문장력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제발 블로그든 SNS든 하세요. 묵묵히 번역만 한다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요. 번역가의 존재감은 번역이 아니라 자신의 글을 통해서 드러나는 법이거든요.
글쓰기는 단순히 나를 알리는 수단이 아니라 내 번역 실력을 키우는 수단이기도 해요. 기업으로 치면 연구개발, 즉 R&D죠. 아무리 좋은 기술력을 보유한 회사라고 해도 R&D에 소홀하면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발전 없이 매번 비슷한 제품 밖에 못 만들 테니까요. 번역가도 마찬가지예요.
당연한 말이지만 번역 실력은 글솜씨에 비례합니다. 자기 글을 못 쓰는데 번역을 잘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번역만 해서는 절대 글솜씨가 늘지 않아요.
왜냐하면 번역은 탐구와 실험이 허락되지 않는 일이거든요. 일단 문장에 대해 깊이 고민할 시간이 없어요. (대체로 빠듯한) 마감을 지켜야 하니까요. 작업 시간이 아니라 결과물의 분량에 따라 보수를 받는 직업의 특성상 한 문장을 오래 붙들고 있으면 그만큼 금전적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도 되도록 문장을 빨리 번역하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표현이나 문장 구조를 실험할 여건도 안 됩니다. 기본적으로 독자들은 작가보다 번역가에게 더 비판적이거든요. 똑같이 문장이 이상해도 작가의 문장은 창의적인 것으로 보거나 내용이 좋으니까 괜찮다고 넘어가지만 번역가의 문장은 발번역으로 보는 경향이 분명히 존재해요. 번역가들도 그걸 잘 아니까 안전한 표현과 문장 구조만 사용하죠. 안전하단 건 곧 자기 글을 쓸 때 써봤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글을 안 쓰면 번역할 때 쓸 수 있는 표현이 늘지 않습니다. 발전이 없죠. 다양한 표현을 구사하는 작가의 책을 옮길 때 그 매력을 다 살리지 못해요. 한계가 뚜렷한 번역가가 되는 겁니다.
사실 저도 번역을 시작하고 한동안은 내 글을 안 썼어요. 비록 남의 글을 옮기는 것이라 해도 어쨌든 종일 글을 쓰는 직업이다 보니까 내 글을 쓸 의욕이 생기지 않아서요. 또 글을 잘 써야 한다는 부담도 강했고요.
하지만 말했다시피 2017년부터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2020년부터는 글을 잘 써야 한다는 부담을 없애기 위해 일부러 인스타에 편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덕분에 글솜씨가 늘었고 당연히 번역 실력도 더 좋아졌습니다.
전 지금 번역가로서 제 실력에 자신이 있어요. 적어도 가독성만큼은 업계 최상위권이라고 자부합니다. 제 글을 쓰면서 어떻게 하면 잘 읽힐지 계속 고민했고 실제로 잘 읽힌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그건 번역에도 고스란히 이어져서 편집자와 독자에게 번역문이 매끈하다는 평을 많이 받았어요.
물론 저도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있죠. 하지만 꾸준히 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더 실력이 좋아질 거란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블로그나 SNS 계정이 없다면 지금 바로 만들고 꾸준히 글을 쓰세요. 그게 번역가로서 실력을 키우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원래는 딱 위의 내용까지만 적을 생각이었는데 어제 <오늘의 웹툰>이란 드라마를 보면서 정말 중요한 게 뭔지 알게 됐어요. 그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저도 좋아하는 판타지 액션 만화 《베르세르크》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한 건데요, 이렇습니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왜 이 대사에 꽂혔냐고요? 제가 브런치에 번역에 관한 글을 쓰고 번역가의 습관에 대한 책도 출간한 사람이다 보니 댓글, 메일, 쪽지로 번역가 지망생들의 문의를 종종 받아요. 그런데 그런 분 중에서 상당수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직장을 다니고 있는데 나와 맞지 않아서 번역가가 되고 싶어요. 번역을 일종의 도피처로 여긴다는 거죠.
저는 아니었어요.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번역가가 되는 게 꿈이었고, 대학 졸업을 앞두고 김해온 번역가님의 블로그를 구독하다가 바른번역 아카데미(현 글밥 아카데미)가 개설된다는 소식을 듣고 1기 수강생으로 들어갔습니다. 1기에 초급반, 2기에 심화반을 듣고 김해온 선생님의 추천으로 2008년 1월에 첫 일감을 맡게 돼요. 그렇게 대학 졸업과 동시에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됐죠.
그 후로 지금까지 15년 정도 일했는데 제게 번역은 한순간도 도피처였던 적이 없습니다. 들이는 수고에 비해 벌이가 시원찮아서 아쉽긴 하지만 번역이란 일 자체는 항상 재미있어요. 고되지만 재미있어요.
전 번역이 좋아요. 얼마전에 내가 굳이 돈을 안 벌어도 될 만큼 부자가 되면 뭘 할까 생각했는데 글 쓰고 번역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게 돈벌이가 잘 안 된다는 것만 빼면 정말 재미있는 일이거든요. 전 번역이 인생의 낙 중 하나예요. 번역을 즐기니까 실력이 느는 게 당연하죠.
번역을 도피처로 생각하는 분들을 비판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번역가가 된 후에도 번역이 여전히 도피처로 남아 있으면 안 돼요. 어차피 이 일은 도피처로서 매력이 없어요. 돈벌이도 잘 안 되는 게 종일 앉아서 문장과 씨름해야 하니까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상당한 피로를 유발하거든요. 정말 재미있어서,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면 못할 짓이에요.
그러니까 번역에서 낙을 못 느낀다면 의욕이 생길 리 없고, 의욕이 없다면 발전할 수 없고, 그러면 높은 번역료를 받을 수도 없어요.
실력 있는 번역가가 되려면 번역을 좋아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네, 뭐 대충 그렇고요, 사실 이 글도 퍼스널 브랜딩의 일환이에요. 이 글을 본 편집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지 번역료 많이 받는다는 자랑을 아주 그럴듯하게 써놨네? 니가 그렇게 잘해? 그럼 우리도 한번 찔러나볼까?’
예, 찔러보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단, 23년 11월까지는 일정이 차 있기 때문에 그 이후 작업물로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