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에도 축지법이 있다면 어떨까? 서울에서 부산을 단 30분 만에 주파하는 도인의 걸음처럼 세월의 거리를 단축할 수 있다면? 이를테면 내가 대입을 준비하느라 ‘자율학습’이라는 명목으로 자정까지 학교에 수용돼야 했던, 그래서 지독히도 길었던 고등학교 3학년 1년을 단 1달처럼 경험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덜었을까.
요즘은 종종 아내에게 말한다. 세월을 빨리 감아서 어서 애들이 중학생이 되면 좋겠다고. 일하지 않는 시간에도 애 보느라 쉴 수가 없고, 특히 주말에는 꼭두새벽에 일어나지 않는 이상 종일 내 시간이랄 게 없으니 차라리 애들한테 손이 덜 가는 시기로 건너뛰면 좋겠다는 이야기다.
사춘기 자녀를 키우자면 몸이 편한 대신 마음이 고생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다. 이제 슬슬 말 안 듣는 여섯 살 첫째 때문에 씹어삼키는 짜증과 분노가 밥 한 끼 안 먹어도 배부를 정도인데, 머리 좀 굵어졌다고 따박따박 말대꾸하면 그나마 다행이고 아예 말도 안 섞고 방 문 쾅 닫고 들어가는 애들은 얼마나 내 배를 부르게 할지 지금이야 상상도 안 간다. 그 대신 내 시간이 많이 생기니까 그때 스트레스를 풀면 되지 않을까, 라고 하면 너무 순진한 생각일까.
그러면 아예 애들이 대학에 가는 시기로 건너뛴다면? 아니, 그러면 (높은 확률로) 애들이 집을 나가서 살 텐데 당장 그러긴 아쉽다. 아직 좀 더 데리고 살면서 같이 밥 먹고 같이 얘기하고 싶다. 같이 사는데 각자의 시간이 있는 삶, 그게 지금 내가 바라는 삶이다. 그래서 애들의 청소년기가 딱이다.
실제로 그런진 모르겠지만 텔레비전을 보면 그 시기에 많은 아빠가 듣는 말이 “아빠가 나한테 해준 게 뭔데?”다. 해준 게 왜 없겠나. 다만 그동안 바깥일로 바빠서 자녀와 충실히 시간을 못 보낸 탓에 소원해진 관계가 그런 가시 돋친 말로 표현될 뿐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아빠가 해준 게 뭔데?”라고 물으면 “너 이 새끼 말 잘했다”라고 사진 증거까지 들아밀며 아빠가 니들 때문에 저녁도 없고 주말도 없는 삶을 살았다고 당당히 공치사 혹은 하소연할 수 있다. 당장은 고된 육아의 시간이 우리 관계에 소중한 자양분이 되는 것을 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기를 단축하는 축지법을 쓸 수 있다 해도 사양할 것이다.
그런 내가 쓰는 축지법이란 기껏해야 피자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걸음 정도가 최선이다. 오늘 (일주일 중 유일한 정기 외출이자 유일하게 일과 육아에서 해방되는 시간인) 성악 교실을 마치고 야식으로 피자를 사 왔다. 피자는 내가 아내보다도 오래 사랑한 존재다. 한국인의 국민 야식은 치킨이지만 나는 치킨 1마리를 줘도 피자 1조각과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육아인에게 식 중의 식은 일과를 마치고 애들 재우고 마음 편히 드는 야식이다. 나이가 들며 다른 피부는 쪼글쪼글해지는데 저 홀로 탱탱한 뱃살 때문에 야식을 한 달에 한 번으로 제한해야 하는 현실이 참담할 뿐이다.
그러니 피자를 들고 돌아오는 나의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웠던가. 피자집을 나서고 몇 걸음 뗐을 뿐인데 벌써 집 앞이었다. 책상 위에 피자 상자를 펼쳐 놓고 요즘 빨래 갤 때도 보고 그림 그릴 때도 보는 드라마 <환혼>을 틀고서 한 조각을 집어들었는가 싶었는데 눈 몇 번 깜빡인 사이에 다섯 조각이 없어지고 에피소드의 절반이 지나갔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축지법이 아닌가. 행복한 시간을 반의 반에서 또 반으로 접어버리는, 슬픈 축지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