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유일하게 부숴도 좋은 것

by 김콤마

애들이 꼭 깨부숴줬으면 하는 것이 있다. 거실 TV다. 결혼할 때 산 삼성 65인치 TV인데 UHD의 시대가 일찍 올 줄 모르고 돈 조금 덜 주고 FHD를 산 탓에 요즘 나오는 고화질 콘텐츠를 제대로 즐길 수 없다. ‘어차피 멀리 떨어져서 보니까 큰 차이 있겠어?’라고 위로했지만 얼마전에 친구네 집에 가서 봤더니 화질이 안경 벗고 시력 0.5와 안경 쓰고 시력 1.0 만큼의 차이가 났다. 나는 큰 욕심 없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UHD로 바꾸는 김에 소소하게 75인치쯤으로 사면 좋을 것 같다. 어차피 바꾸는 것 사운드바도 세트로 할인해준다면 소리 더 쨍쨍한 거로 바꾸고.


그런데 우리 집 애들은 TV에 기껏해야 손자국만 낼 뿐이다. 다른 집 아들내미들은 공이나 방망이로 잘도 때려 부수던데 우리 애들은 TV 앞에서 언제나 조심스럽다. 애들 놀 때 내가 슬쩍 부수고 애들한테 뒤집어씌워야 할 판이다.


하긴 비싼 돈 주고 TV를 바꿔 봤자 다 부질없는 짓이다. 어차피 보지를 못하는데 무슨 소용인가. 우리 집 TV는 순전히 애들 만화 보는 용도다. 가끔 짬이 나서 내가 보려고 하면 볼 게 없다. 아니, 볼 건 많은데 볼 수가 없다. 애들이 같이 보겠다고 옆에서 떠나질 않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싶은 프로를 들면 십중팔구 5분 안에 피가 튀기거나 나쁜 말이 나온다.


언젠가 우리 80년대 생에겐 영원한 터미네이터인 아놀드 슈워제네거 옹이 첩보원으로 나오는 넷플릭스 시리즈 <푸바(Fubar)>가 신규 콘텐츠로 올라왔다. 잠깐 맛만 볼까 하고 틀었더니 잘 나가다가 갑자기 주인공이 악당들을 쏘고 쑤셨다. 내 취향이다. 나는 원래도 폭력적인 액션물을 좋아했지만 애들 키우면서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니까 요즘은 그런 말초적인 콘텐츠가 더더욱 당긴다. 물론 애들 앞에서는 볼 수가 없다. 그러니까 호기롭게 TV를 틀었다가도 아이쇼핑하듯 이 프로, 저 프로를 둘러보다가 결국에는 애들 만화나 틀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거실에서 TV를 보는 시간은 밤에 애들 재우고 빨래를 갤 때 뿐이다. 애들 깰까 봐 헤드폰 쓰고 본다. 그래서 영화 감상용으로 좋다는 YH-L700A라는 헤드폰을 거금 들여 장만했다. 과연 쏘고 쑤시고 터트리는 소리가 빵빵하게 들린다. 그래봤자 30분이다. 빨래는 아무리 꼼꼼히 개도 30분이면 끝이다. 빈손으로 TV를 보고 있으면 ‘이럴 시간에 뭐라도 생산적인 일을 해서 가계에 보탬이 되자’라거나 ‘차라리 잠을 자지’라는 슬픈 생각이 자꾸만 몰려온다.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생산적인 일이라고 해봐야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 정도다. 나는 주로 그림을 택한다. 모니터로 영화나 드라마를 틀어놓고 소리를 들으면서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꾸만 모니터를 보느라 20분이면 그릴 것을 1시간 동안 붙잡고 있지만, 그 정도 비생산성은 밤마다 생산성을 도모하는 육아인에게 허락해줘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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