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때려치우고 싶은 중년에게 필요한 건

by 김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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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 씨, 이 일 하지 마. 돈도 명예도 안 따르는 일이야.

2007년에 번역을 배울 때 현직 번역가 선생님에게 들은 충고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젊어서 뭘 몰랐어요. 남들은 못해도 나는 돈도 명예도 다 가질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약 20년이 지난 지금은 선생님이 경고하신 삶을 살고 있습니다. 돈이든 명예든 단 하나라도 붙잡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하고 있어요. 어쩌면 그때 선생님 말씀을 들어야 했는지도 몰라요.


그러다 보니 최근에는 아예 때려치우는 것도 고려 중이었습니다. 첫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육아 부담이 늘어나는 바람에 올 상반기까지만 일하고 당분간은 쉬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것 그냥 업계를 떠나버릴까 하는 마음이었죠.


그러던 중에 진주문고 혁신점의 박 과장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어요. 이런 심정을 말했더니 한번 읽어보라며 책 한 권을 사주셨습니다. 김호연 작가의 <나의 돈키호테를 찾아서>. 선물로 받았으니 읽을 수밖에요.




시작은 김호연 작가의 폭망입니다. 데뷔작 <망원동 브라더스>가 어느 정도 판매고를 올렸지만 이후로 내리 세 작품이 쪽박을 찼어요. 전업 작가가 된 지 20년쯤 된 시점에 어느 출판사도 계약을 안 해주는 상황이 되자 소설을 쓸 마음조차 안 생깁니다. 그저 다 때려치우고 싶을 뿐이죠.


바로 그때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3개월간 체류할 기회가 생겨요. 토지문화재단의 교환 작가 자격으로요. 그래서 홀로 스페인으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그저 먹고 마시고 걷습니다. 예, 쓰라는 작품은 안 쓰고 돈키호테와 작가 세르반테스의 흔적을 찾아다니면서 매일 산책과 식도락을 즐겨요. 하지만 작가는 그래도 된다고 합니다. 꼭 글을 쓰지 않아도 걷고 마시고 대화하면서 영감을 얻고 작품을 구상한다면 그것 또한 작가의 일이란 것이죠.


그렇게 그는 매일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돈키호테와 같은 패기로 다시 한번 소설을 쓸 각오를 다지며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하필 그때 코로나 사태가 터져요. 그래서 그간 구상했던 돈키호테 소설을 쓸 여건이 안 돼요. 그래서 그 대신에 이전에 구상했던, 왠지 안 될 것 같은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게 바로...


<불편한 편의점>입니다.


아시다시피 <불편한 편의점>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끕니다. 속편까지 출간되어 지금까지 100만 부가 넘게 판매됐고 세계 20여 개국에 출간 계약이 됐어요. 망해서 다 때려치울 뻔한 소설가가 단번에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한 것이죠.


이게 다 마드리드에서 시작된 일이에요. 계속 걸으며 새로운 각오를 다진 데서요.




얼마 전에 김호연 작가님의 북토크에 가서 사인을 받았는데요, 그때 적어주신 말씀이 "계속 걸으세요"입니다. 그래요, 길이 안 보일 땐 계속 걸어야 해요. 수피즘 시인 루미가 그랬다잖아요.


길은 걸을 때 비로소 보인다.

만일 김호연 작가가 마드리드에서 석 달을 걷기 전에 절필했다면 원히트원더 작가로 남았겠죠. 3개월이라는, 인생 전체로 보면 찰나라 할 수 있는 순간을 버틴 게 인생이 완전히 새로운 장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딱 3개월이요.


저는 지금 번역가로서 길이 안 보여요. 내 앞에 길이 있는지, 이 길이 맞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포기하고 다른 길로 가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에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지금 나도 인생에서 찰나를 버티기만 하면 되는 분기점에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조금만 버티면 멋진 게 기다리고 있는데 그걸 못 버텨서 지금까지 고생한 게 말짱 헛것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요.


그래서 일단은 계속 걸어보려고요. 제가 번역가로 산 세월이 만으로 17년이 좀 넘었는데 20년까지는 채워보고 결정하려고요.


제가 지금 40대 중반인데 이 나이대가 참 그런 것 같아요. 이때까지 20년 정도 어떤 일에 매진했는데 아직 빛나는 결실을 맺지 못한 거죠. 젊을 때 내가 목표로 했던 대단한 것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어요. 그냥 세상의 어디 한구석에 틀어박힌 채 아무도 몰라주는 아저씨가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최근에 본 <촌구석 아저씨, 검성이 되다>란 만화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당신은 틀어박혀 있었던 게 아니야. 준비하고 있던 거지. 언젠가 찾아오게 될 그 '역할'을 위해서.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위해 준비된 '역할'에 도달하려면 지금 조금 더 걸어야 하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더 걸어보려고요, 번역이란 길을.


대신 양다리를 걸치려고요. 김호연 작가도 말해요. 플랜B가 중요하다고요. 그도 시나리오 작가로 시작해서 시나리오와 소설을 병행하며 언제나 둘 중 하나로 생활비를 벌었거든요. 그러다 마침내 소설가로서 빛나는 역할에 이른 것이고요.


그러니까 저도 번역을 하면서 창작을 플랜B로 꾸준히 해보려 합니다. 창작과 번역이란 두 길에 양다리를 걸치고 계속 걸어보려고요. 지금은 출판계 혹은 창작계 한 구석에 틀어박힌 내가 언젠가 어떤 역할을 맡게 될 날이 올 거라 믿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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