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짐이다.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옆에 재워놓고 일하면 되는 줄 알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이는 절대 옆에서 잠자코 자거나 알아서 노는 존재가 아니다. 옆에 있으면 자꾸 뭔가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짐이다. 아이를 보면서 번역을 하는 것은 커다란 봇짐을 등에 업고 일하는 것과 같다. 게다가 그 짐이 말까지 한다!
그러면 번역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그렇진 않다. 번역가는 프리랜서라서 직장인보다는 육아하기에 좋은 직업이다. 그래도 아이는 짐이니까 그 짐을 누가 좀 맡아줘야 한다. 그래서 번역과 육아를 병행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애들이 나가는 것이다. 아침에 등원/등교해서 오후에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단 몇 시간이라도 바짝 집중해서 일할 수 있다.
요즘 내 업무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다. 아이들의 스케줄과 컨디션에 따라 유동적이긴 하지만 대체로 그렇다. 단, 그 시간을 모두 번역에 쏟지는 못한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최소한의 가사 노동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는 청소와 설거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아무리 로봇청소기와 식기세척기를 쓴다고 해도 청소기의 물통을 채우고 걸레를 교체하고 바닥의 물건과 의자를 정리하는 것과 음식물을 제거하고 가지런히 식기를 배열하는 것 같은 전처리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잡일이 최소 1시간은 잡아먹는다.
아이의 일시적 부재가 첫 번째 조건이라면 두 번째는 넉넉한 작업 일정을 받는 것이다. 아이가 저녁 먹을 때쯤 귀가하지 않는 이상 육아를 하면서 풀타임으로 일하긴 어렵다. 그러니까 남들보다 작업 기간을 많이 받아야 한다. 일정이 촉박하면 촉박한 대로 밤을 새서라도 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도 시간에 쫓기면 번역 원고가 허술해지고, 그러면 신뢰도가 떨어져 일감을 받기가 어려워진다. 또 한편으로 내 몸이 피곤하고 마음이 불편하면 괜히 아이에게 신경질을 냈다가 자책하는 날이 많아진다. 일정을 넉넉히 받는 게 나와 아이 모두에게 이롭다.
출판사는 일반적인 단행본 한 권에 번역 기간을 2~3개월 정도 주는데 나는 주로 4개월 이상 받는다. 기본적으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데다 아이가 아파서 일을 못할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만 해도 첫째가 장염으로 내리 사흘을 집에서 보냈다. 이럴 때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일부러 마감일을 멀리 잡는다. 물론 번역 기간은 항상 내가 원하는 대로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다행히 나는 경력이 있다 보니 일정을 늦춰서라도 일을 맡기겠다는 출판사들이 있긴 하다. 그래도 일정 조율이 안 돼서 의뢰를 거절한 책이 최근 1년만 해도 5권 정도 된다. 남들 1년 치 일감이다. 아직 경력이 짧은 번역가라면 충분한 일정을 받기가 더 어려울 수 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면 아이를 키우면서 번역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면 감수해야 할 문제가 크게 세 가지 있다. 첫 번째 문제는 벌이가 줄어드는 것이다. 일하는 시간이 줄어드니까 어쩔 도리가 없다. 고용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프리랜서는 육아를 이유로 단축 근무를 하더라도 누가 감소하는 소득의 일부를 보전해주지 않는다. 내 경우에는 아내와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타격은 없었지만 만일 번역가가 주소득자라면 가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육아와 번역을 병행할 때 감수해야 할 두 번째 단점은 경력이 정체된다는 것이다. 프리랜서는 포트폴리오와 거래처가 중요하다. 번역가는 꾸준히 작업해서 역서를 늘리고 나를 신뢰하는 편집자를 늘려야 한다. 역서가 많이 나와야 인지도가 높아져서 일이 더 안정적으로 들어오고, 일이 많아져야 역서가 늘어난다. 그런데 육아에 시간을 빼앗기면 역서를 많이 낼 수가 없다. 그리고 아무리 일정이 안 맞아서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번역 의뢰를 거절하면 그 편집자가 다시 나를 찾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면 나는 잠재적 역서와 거래처를 모두 잃는다. 그러다 보면 내 커리어의 잠재력을 해칠 수 있다. 이 경력 정체는 육아하는 번역가가 감수해야 할 세 번째 문제점과 맞물려 있다.
그것은 종일 남 뒤치다꺼리만 하다 나는 사라져버리는 것 같은 박탈감이다. 육아는 확실히 뒤치다꺼리가 맞다. 매일 아이들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먹이고 치우고 씻기고 놀아주고 가르쳐주고 재워야 한다. 그러면 번역은? 나는 육아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번역도 뒤치다꺼리로 느껴질 때가 있다. 작가가 써놓은 글을 그의 등 뒤에서 다른 말로 옮기는 사람, 그러다 작가가 수습을 못 하고 어수선하게 써놓은 문장이 나오면 대신 수습하는 사람. 잘 해봐야 담당 편집자 말고는 누가 잘 알아주지도 않는 사람. 열심히 일했지만 벌이는 소박한 사람. 그나마 번역은 많지 않은 돈이나마 받기라도 하니 다행이다. 육아는 완전한 무급 노동이다. 고생했는데 당장 내 손에 들어오는 게 없다. 가시적인 성과가 안 보인다. 애들이 잘 크는 것에 내 지분이 얼마인지 알 수 없고, 아이와 나 사이의 애정과 친밀도가 점수로 표시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자꾸 내가 그냥 종일 남 뒤치다꺼리를 하고 보상은 제대로 못 받는 기분이 든다.
물론 번역과 육아를 병행할 때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상사태에 언제든 대응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아이가 끙끙대서 열을 재보니 39도일 때 직장인 부부라면 누가 급하게 휴가를 쓰고 병원에 데려가야 할지 고민해야겠지만 번역가는 일정이 촉박하지 않은 한 내가 아이를 챙기면 된다. 지금까지 우리 부부는 아이 때문에 시간을 내야 하는데 둘 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곤란했던 적이 거의 없었다.
번역과 육아를 병행할 때 누리는 두 번째 장점은 아이가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은 학교를 마친 후 여러 학원을 거쳐 저녁에 귀가하는 아이가 많다. 그런 게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아이도 부모도 원치 않는데 집에 어른이 없어서 아이가 학원이 됐든 보육시설이 됐든 집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면 부모로서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 수 있다. 우리 애들은 보통 3~4시에 귀가한다. 그때부터 네 살 둘째는 자기 전까지 마냥 놀고 초등학교 1학년 첫째는 공부도 하지만 대체로 논다. 어릴 때는 충분히 노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 애들은 그러고 있다. 아빠가 3시까지만 일하기 때문이다. 나까지 바쁜 직장인이었다면 누리지 못할 호사다.
내가 느끼기에 우리 아이들은 행복하다. 매일 깔깔대는 것을 넘어 숫제 까악까악대며 논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나도 덩달아 행복해지지 않느냐고? 지난 7년을 돌아보면 나는 육아가 적성에 안 맞는 사람이다. 청각이 예민해서 아이들이 흥분했을 때든 짜증이 났을 때든 높은 음조로 지르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가끔은 제발 입 좀 다물라고 소리치고 싶다. 청각만 그럴까. 성격도 예민해서 아이들의 감정 기복에 내 감정이 자꾸 휘둘린다. 그런데도 내가 주양육자인 이유는 직장인인 아내보다는 프리랜서인 내가 육아를 하는 게 더 편하고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육아 능력은 레벨업이 더딘지 여전히 나는 육아가 힘들다. 솔직히 하기 싫을 때도 많다. 이것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의 문제다.
육아인은 심리를 잘 다스리는 게 중요하다. 내 심리는 줄곧 내가 반쯤 실패한 사람 같다는 자괴감이었다. 번역에 매진해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거나 돈을 많이 번 것도 아니고, 너른 마음으로 아이들을 잘 품어주는 아버지도 아니다. 그러니까 수시로 마음에 불만이 차올랐다. 항상 바쁘고 피곤하게 사는데 변변히 이룬 것은 없어서 답답했다. 심리 상담을 받으니 무기력감이 심하고 우울증으로 넘어가는 경계선에 있다고 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내가 타인을 우선순위로 두고 살기에는 마음이 좁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살아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아이들을 최우선으로 두고 나는 뒷전이었다. 그렇게 몇 년을 살았더니 마음이 망가진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원래 육아란 게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내가 챙기지 않으면 아직 혼자 할 수 없는 게 많은 작은 인간이 나보다 먼저인 게 당연하다. 그게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나는 줄곧 육아가 괴로웠다.
그러나 이렇게 징징대다가도 문득 행복해지는 순간이 있다. 마치 유체이탈을 하듯 무대 밖에서 아이들과 내가 있는 장면을 보는 것 같은 감각이 생길 때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그렇게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그 작은 인간들의 존재가 그저 감사하다. 그들이 없었다면 내 삶은 얼마나 단조로웠을 것이며, 나는 인간 감정의 극한을 경험하고 인격을 함양할 기회를 얼마나 많이 놓쳤을 것인가. 무엇보다 그저 아빠라는 이유로 누군가가 나라는 존재를 마냥 좋아해주는 기쁨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단하고 무기력하고 때로는 우울하지만 또 행복하다.
번역에 느끼는 감정도 비슷하다. 앞에서 저자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기분이라고 푸념했지만 번역은 무척 재미있는 일이다. 누군가가 수년 간 쌓은 지식과 경험을 다시 수개월 혹은 수년에 걸쳐 정리한 자료를 단어 하나하나 곱씹어 가며 읽고 그것을 또 수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게 우리말로 다시 쓰는 것은 나처럼 지적 허영심이 강한 인간에게 부합하는 직업이다. 그래서 나는 힘들다고 징징대면서도 계속 번역가로 산다.
다만 최근에는 이 육아와 번역이라는 고달프지만 행복한 두 가지 유형의 뒤치다꺼리 사이에서 균형점을 좀 조정하기로 했다. 그 동안은 주말에도 계속 육아를 매진했지만 얼마 전부터는 적어도 하루, 가능하면 양일 모두 밖에 나가서 3~4시간 정도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육아에 치여서 꽉 막힌 숨통도 트이고 일을 해서 커리어도 개발하고 일석이조다. 주말에도 일하면 힘들지 않을까? 조상님들이 말씀하셨다. “애 보느니 밭매러 간다”고. 그 말이 옳다. 진작 이렇게 할걸 하는 생각도 들지만 지금까지는 아이들이 어려서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는 그들도 어느 정도 컸으니 내 삶에서 나의 비중을 조금 더 키웠다. 주말에 일하러 나서는 걸음이 가볍다.
육아와 번역은 동행 가능한가? 가능하다. 단, 무척 힘들다. 육아란 게 원래 그런 일이니 어쩔 수 없다. 이쯤에서 정정해야겠다. 아이는 짐이 아니다. 하지만 육아는 짐이다. 문득 내가 커다란 돌을 짊어지고 언덕을 오르는 시시포스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이 등정은 무한히 반복되지 않고 언젠가는 끝난다. 육아 선배들은 그때가 되면 지금이 그리울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버티는 수밖에. 선의와 애정으로든, 악으로 깡으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