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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번역하면 욕먹겠지

by 김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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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는 욕받이다.


칭찬을 받을 때보다 욕을 먹을 때가 많다. 번역가의 입장에서는 만만한 게 번역가인 것 같다. 책을 읽다가 불편하면 일단 번역가 책임이 되는 것 같다. 이해한다. 나도 번역가가 되기 전에는 번역가부터 탓하고 봤으니까. 작가는 당연히 글을 잘 쓸 것이라고 생각하면 범인은 번역가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가가 다 글을 잘 쓴다는 전제는 틀렸다. 내가 지금까지 50권이 넘는 책을 번역해본 경험에 비춰보면 단번에 의미가 파악되지 않는 문장, 혹은 대략 무슨 뜻으로 썼을지 짐작은 가는데 막상 번역하려고 보면 빈틈투성이라서 번역가가 깊은 추론과 분석으로 그 빈틈을 다 매워야하는 문장을 쓰는 작가가 적지 않다. 내가 주로 번역하는 책이 경제경영서라서 더 그럴지도 모른다. 이쪽은 자기 분야에서 실력은 있지만 글쓰기 훈련이 충분히 되지 않은 사람이 책을 쓰는 경우가 많다. 물론 책이 편하게 읽히지 않는 것을 다 작가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번역가의 문제인 경우도 분명히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다뤄볼 예정이다.


그 외에 작가나 번역가의 잘못이 아니라 번역이란 행위의 특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읽히지 않는 문장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번역은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두 언어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부자연스러운 문장이 생길 수밖에 없다. 번역가에 따라서는 일부러 그런 언어 간의 차이를 부각하기도 한다. 일명 ‘낯설게 하기’라는 기법인데 의도적으로 원문의 표현을 직역에 가깝게 살리는 방식이다. 낯설게 하기의 취지는 번역어, 그러니까 우리의 경우에는 한국어에 새로운 것을 주입해 표현의 폭 내지는 잠재력을 키우는 것이다. 내가 지향하는 번역의 형태는 아니다. 나는 원문의 스타일을 살리면서도 되도록 한국어다운 문장을 쓰려 한다.


그러나 그게 언제나 가능하진 않다. 원문은 내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의 의도(혹은 의도라고 짐작되는 것)을 살리기 위해 어느 정도 자연스러움을 포기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I'm disadvantaged because of my gender and my race”라는 문장을 보자. 어려운 단어나 복잡한 구조가 쓰인 문장은 아니다. 직역하면 “나는 성과 인종 때문에 불리하다”가 된다. 더 자연스럽게 읽히려면 “나는 흑인 여성이라서 불리하다”라고 쓰면 된다(저자가 흑인 여성이다). 그러나 둘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는 고민이 필요하다. 저자가 굳이 “because I'm a black woman”이라고 쓰지 않고 ‘gender’와 ‘race’라는 더 추상적인 표현을 사용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 자신의 이야기지만 개인의 차원을 넘어 성과 인종 때문에 벌어지는 더 보편적인 차원의 차별을 떠올리게 하려는 의도로 쓰진 않았을까? 만일 그렇다면 원문의 표현을 그대로 살려야 하지 않을까? 사실 이 문장은 책 전체에서 그리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그러나 번역가는 혹시 사소한 것 하나에도 어떤 의도나 의미가 숨어 있진 않을까 하는 탐구심 혹은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번역가는 책이라는 숲만 보면 안 되고 발밑의 돌도 하나하나 뒤집어 봐야 한다.


남의 글을 옮기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하게 생기는 제약이다. 물론 귀찮고 불편하다. 원문을 살리는 것과 자연스러움을 살리는 것 사이에서 균형점을 어디에 둬야 할지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헷갈린다. 하지만 원래 재미란 한계에서 오는 것이다. 그런 한계를 넘어 원문의 결을 살리면서도 자연스럽게 읽히는 문장을 만들기 위해 온갖 단어를 조합하는 것, 그게 번역가로서 느끼는 큰 재미다.


그렇다고 항상 원문의 어휘와 문체적 특성을 우선시하는 것은 아니다. 말했듯이 글을 못 쓰는 작가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머릿속에 든 아이디어는 좋은데 그것을 분명하고 정교한 문장으로 풀어내지 못한다. 그런 책을 또 원문을 존중한다며 곧이곧대로 옮기면 욕을 바가지로 먹는다. 그럴 때는 작가(그리고 원서의 편집자)가 못 한 일을 번역가가 대신 해야 한다. 단어와 단어의 아귀가 불일치성에 의해 문장의 흐름을 깨서는 안 되는 것을 확실히 잡는 것은 번역가의 본연이다. 응? 대충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짐작은 가지만 정확히 무슨 의미라고 말하긴 애매할 것이다. 다소 과장하긴 했어도 정말로 이렇게 알 듯 말 듯 허술한 문장이 수두룩한 책들이 있다.


그러면 번역가는 “단어와 단어의 아귀가 맞지 않아 문장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을 때 그것을 손보는 것이 번역가가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라고 고쳐줘야 한다. 상당히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이다. 원래 못 쓴 글을 고치는 게 새로 글을 쓰는 것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럴 때 나는 저자의 고통을 생각한다(욕도 하면서). 머리에는 좋은 생각이 들어 있는데 그것을 아무리 표현하려 해도 매끄럽게 표현이 안 돼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래서 내가 저자의 편이 돼주는 것이다. 일종의 서비스다.


나는 이런 서비스를 잘 한다. “애는 제가 쓸게요!” 내 웹사이트의 첫 문장으로 번역가로서 나의 모토다. 내가 고생하더라도 어떻게든 잘 읽히는 문장을 만들어서 편집자와 독자는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가 그런 다짐을 잘 지키고 있는 것인지 문장이 허술한 책들이 자꾸 들어온다. 아니, 이렇게 쓰면 내 역서의 저자들이 죄다 의심을 받을 테니 안 되겠고, 그런 책들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이라고 하면 내가 좀 손해를 보는 느낌이고), 잊을 만하면 두 번씩 들어온다. 어쩌겠는가. 프리랜서는 함부로 일을 거절하는 게 아니다. 그런 건 언제나 2년 치 일감이 대기 중인 대가들에게만 허락되는 사치다.


지금까지 번역했던 책 중에서 문장이 가장 깔끔했던 책은 존 맥스웰의 저서였다. 그의 책을 두 권 번역했는데 문장의 의미를 고민하거나 복잡한 문장을 어떻게 풀어써야 할지 난감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글을 고쳐주는 찰리 웨첼(Charlie Wetzel)이라는 작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직접 ‘감사의 말’에서 언급하는 내용이다. 그런 책만 번역하고 살면 효율이 팍팍 오르고 소득도 팍팍 오를 텐데! 하지만 어쩌랴, 책을 고르는 것은 내가 아니라 출판사인 것을. 그리고 문장이 부실해도 내용은 충실한, 그래서 독자에게 뼈와 살이 될 책이 너무나 많은 것을.


이 고난은 의미가 있다. 하도 문장 때문에 고민을 하다 보니 점점 문장력이 좋아지는 것이다. 나는 번역을 시작하고서 내 생각을 자연스럽게 문장으로 풀어내는 능력이 꾸준히 향상됐다. 번역가만 아니라 작가로도 살고 싶은 내게는 분명히 이득이다. 만일 언젠가 내가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둔다면, 이 영광을 지금까지 저를 고생시킨 작가님들에게 돌리겠습니다. 에, 가장 먼저 감사드릴 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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