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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때려치우고 번역을 하시겠다고요?

by 김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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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는 싫다, 생각만 해도.


그저 생각뿐이다. 나는 대학 졸업과 함께 번역가가 됐기 때문에 직장 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 회사를 다니는 고통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생각만으로도 알겠다. 나는 단체 생활이 안 맞는 사람이다. 학교 다닐 때 남들과 하루 몇 시간씩 한 공간에 있는 게 곤욕이었다. 어차피 다 같은 학생인데도 그랬다. 그렇다면 위계질서가 확실히 서 있고 성과의 압박과 경쟁, 정치가 상존하는 회사는 얼마나 괴로울지 상상이 간다. 아니, 상상이 안 간다고 해야 하려나. 여하튼.


종종 내게 직장을 그만두고 번역가가 되고 싶다면서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심정을 알 것 같다.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대개 사람 때문에 생기는 것인데 번역가는 종일 혼자 일하며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니 좋아 보이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번역가는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별로 없다. 번역가가 업무상 접촉하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웬만해서는 출판사 편집­자가 전부인데 편집자는 두세 달 치 일을 맡겨 놓고 작업이 끝날 때까지 거의 간섭을 안 한다. 중간 원고나 최종 원고를 보낸 후에 할 말이 있으면 연락하고 이때도 주로 이메일로 소통한다.


나는 처음부터 에이전시에 소속돼 일하다 보니 편집자와 직접 연락할 일이 더욱 없어서 세 번째 역서 작업을 끝낸 후에야 처음으로 편집자의 전화를 받았다. 동네 목욕탕에서 개운한 기분으로 옷을 챙겨 입을 때였는데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이유는 내가 생전 처음 듣는 호칭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편집자는 팬티 바람의 나를(물론 그것을 알지는 못했겠지만)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말만 그런 게 아니라 그 호칭에 걸맞게 나를 정중히 대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20대 중반의 나는 그 융숭한 대접에 몸둘 바를 몰라 반쯤 벗은 몸으로 허공에 대고 연신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편집자들은 대부분 번역가를 그렇게 깍듯이 대한다. 번역가의 문장에 이견을 제시할 때도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편집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정말 단 한 번도 없었다. 번역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해봐야 문장이 안 풀려서 짜증이 나거나 한 문장 한 문장 고심해서 번역을 마친 후 입금된 번역료의 초라한 수치를 보고 한숨을 쉬는 것 정도가 전부다. 그래도 이런 것은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스트레스다. 문장이 이해가 안 되거나 깔끔하게 번역되지 않을 때는 더 읽고 더 고민하고 더 자료를 찾으면 된다. 벌이의 문제는, 아, 이건 내 힘으로 해결이 안 되는구나. 하지만 어차피 많이 못 버는 줄 알고 시작한 일이다. 그리고 지금은 나도 번역료가 꽤 올라서 소득이 서글플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까 번역가로서 내가 받는 스트레스는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타인’이란 존재, 그 중에서도 상사라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가 유발하는 압도적인 스트레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번역을 시작하고 10년 동안은 정말 행복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도 번역하고 저녁에는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재미있게 보내야지!’ 하는 기대감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런 행복감이 사라진 것은 번역과 무관하다. 아이가 태어나고 모든 게 달라졌다. 육아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는 “애 보느니 밭 매러 간다”는 조상의 지혜로 갈음하겠다.


번역은 적어도 나처럼 적성에 맞고 애초에 조직에 속해본 적 없는 사람에게는 스트레스가 별로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직장을 다니다 번역가가 되면 이전에 당연하게 누리던 것의 부재를 느낄 수 있다. 월급과 일의 부재. 프리랜서는 꼬박꼬박 급여가 들어오지 않는다. 부지런히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일도 마찬가지다. 초기에는 일이 없어 놀아야 하는 날이 생각보다 많다. 며칠 쉬는 것은 좋지만 그런 날이 일주일을 넘어가면 불안해진다. 일을 안 하면 벌이도 없다. 프리랜서에겐 유급 휴가가 없다. 하루를 쉬면 하루 치 소득이 고스란히 날아간다. 또 없는 게 같이 문제를 고민할 동료다. 번역가는 책 앞에 선 단독자다. 저작권이 만료된 고전이 아닌 한 모든 책은 단 한 출판사에서만 출간된다. 즉, 지금 내가 번역하는 책은 국내에서 나만 유일하게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은 내가 겪는 문제의 맥락을 모른다. 그래서 같이 고민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번역가는 완전히 혼자다. 누구도 내 일을 대신 혹은 같이 해줄 수 없다.


그런 것을 감수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 번역가가 되고 싶다면 일단 세 가지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테스트1: 외국어에 능통한가?

번역가가 되려면 영어(혹은 해당 외국어)를 얼마나 잘해야 하느냐고, 또는 지금부터 외국어 공부를 시작하면 번역가가 되기까지 얼마나 걸리겠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미안하지만 그린 것을 묻는 순간 탈락이다. 번역가가 될 만한 사람은 이미 외국어에 자신이 있다. 물론 번역가는 듣기, 말하기, 쓰기는 빼고 읽기만 잘하면 된다. 언제든 사전을 찾을 수 있으니까 엄청난 어휘력이 필수인 것도 아니다. 다만 원서를 읽는 데 무리가 없어야 한다. 혹시 자신의 실력 정도면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아직 긴가민가하다면 직접 번역을 해보면 된다. 짧은 글 몇 편을 골라서 번역을 해보면 감이 올 것이다.


테스트 2: 남들에게 글솜씨를 인정 받는가?

반드시 남들에게 인정 받아야 한다. 그 정도는 돼야 남들에게 욕은 안 먹는 번역문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번역할 때는 원문이란 올가미 때문에 내 필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다. 일단 원문을 읽고 나면 그 구조와 어휘가 머릿속에 각인돼 벗어나기 어렵다. 흔히 번역투라고 하는 부자연스러운 문장이 생기는 이유가 거기 있다. 그렇다고 이 올가미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내 스타일로 문장을 새로 써버리는 것도 안 된다. 그건 리라이팅이지 번역이 아니다. 올가미에 끌려가지도 말고 아예 끊어버리지도 말고 적당히 벌려서 숨 쉴 틈만 만드는 것, 그게 번역이다. 생각처럼 쉽지 않고, 그래서 내 글을 쓸 때의 필력을 100이라고 한다면 번역에는 80만 발휘할 수 있어도 다행이다.


테스트3: 부양할 가족이 없는가?

번역가는 최소한 처음 5년간은 안정적이고 평균적인 소득을 올리기 어려운 직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딸린 식구를 혼자 벌어서 먹여야 한다면 온 가족이 가시밭에 내던져질 수 있다. 버는 사람은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도 돈이 안 벌리니까 좌절하고 가족은 가족대로 앞으로 언제 또 상황이 나빠질지, 혹은 더 나아지긴 할지 알 수 없으니 불안하다. 그래서 기왕에 번역을 시작할 것이라면 싱글일 때 시작하는 게 좋다.


이 3대 테스트를 다 통과했다면? 아직 진짜 테스트, 최종 보스가 남았다.


진테스트: 나는 진심으로 번역을 하고 싶은가?

내가 원하는 게 번역가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직장에서 도망치는 것인지 솔직하게 생각해보자. 만일 후자라면 만화 《베르세르크》에 나오는 명언이 있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직장이 지옥 같을 때 번역가의 삶이 낙원처럼 보이는 것은 신기루일 수 있다. 막상 도착해보면 직장에 다닐 때와는 다른 고민, 고통, 고뇌가 존재하는 지옥에 불과할지 모른다. 더군다나 여기는 일단 들어오면 다시 도망치기가 어렵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사실상 지위는 실직자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은행에 가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대출도 안 나오고 신용카드 한 장 만드는 것조차 어렵다. 이직을 하려면 회사에 다닐 때 하라고들 하지 않는가. 실직자가 되어 경력이 단절되고 나면 조직의 문은 굳게 닫힌다.


이곳이 지옥이 안 되려면 정말 원해서 와야 한다. 이전 글에서 말한 대로 적성에 맞는 사람만 버틸 수 있는 곳이다. 그러면 번역이 내 적성에 맞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말했다시피 실제로 번역을 해보면 된다. 그러면 과연 할 만한지, 업으로 삼을 만한지 알 수 있다.


이 최종 테스트까지 통과했다면? 결코 낙원이라 할 수는 없지만 동료가 된 것을 환영합니다. (화르륵, 돌아가는 다리가 불타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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