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방점은 ‘적당히’에 찍힌다. 너무 노력하면 손해다. 번역가는 노동 시간이 아니라 결과물의 분량(원고지 매수로 환산한 번역 원고의 분량)을 기준으로 보수를 받기 때문이다. 똑같이 장당 4,000원을 받고 똑같은 시간을 일할 때 한 달에 700장을 번역하는 사람보다 1,400장을 번역하는 사람이 돈을 배로 많이 받는다.
그러나 ‘적당히’는 매우 어려운 문제다. 어디가 균형점인지 확실히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적절한 품질을 유지하면서 적절한 소득을 올리는 균형점이 어디쯤일까? 경력이 쌓이면 하루에 몇 장 정도를 번역하면 적당하겠다 싶은 지점이 생긴다. 내 경우에는 하루에 원고지 기준으로 50장을 번역하는 게 적당하다.
그러나 그 적당한 선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원고의 난도다. 번역하기 까다로운 원문을 만나면 원하는 만큼 속도가 나지 않는다. 이것은 외적 요인이다. 또 하나는 내부의 적인 욕심이다. 완벽한 번역 원고를 만들고 싶은 욕심. 물론 완벽한 번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번역에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번역가끼리 하는 말이 있다. 정답에 가까운 번역은 있다고.
정단에 가까운 번역이란 무엇일까? 모국어로 자연스럽게 읽히면서 원문의 특징과 정보를 잘 간직한 번역이다. 그런 번역문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번역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모자라 아주 쏟아붓게 만든다.
사실 나는 완벽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이다. 매사에 적당함을, 심하면 ‘대충’을 추구한다. 내 글을 쓸 때조차도 초고를 많이 고치지 않고 이 정도면 적당하다 싶은 수준에서 마무리한다. 그러나 번역에 임할 때만큼은 다르다. 평소와 비교되지 않는 꼼꼼함과 품질우선주의를 지향한다. 예를 들면 더 정확한 번역을 위해 저자가 언급하는 논문을 굳이 찾아서 해당 부분을 읽어보는 것이다(시간 관계상 매번은 아니고 원문만으로는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을 때에 한해). 아는 단어도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으면 사전을 검색하고 내가 쓴 한국어 표현이 자연스럽다는 확신이 들지 않으면 용례를 찾아본다.
그리고 원문 대조가 있다. 나는 검토 과정에서 번역 원고 전체를 원문과 대조한다. 한 번에 다 하는 것은 아니고 챕터별로 나눠서 한 챕터의 번역이 끝나면 이전 챕터를 검토하는 식이다. 이 전수 검사 과정에 소요되는 시간이 대략 전체 작업 시간의 20퍼센트 정도다. 그 외에 챕터별로 한국어 원고만 읽고, 최종적으로 전체 원고를 읽는 것도 검토 작업에 포함된다. 문장을 한국어로 옮기는 좁은 의미의 번역 외에 한국어 문장을 읽고 다듬는 과정에도 많은 시간을 쓴다.
말했듯이 번역가는 작업 시간과 무관하게 보수를 받기 때문에 이 검토에 들어가는 시간이 길어지면 소득이란 측면에서 독이 된다. 특히 원문 대조는 워낙 많은 시간이 소요돼서 돈벌이의 효율성을 생각하면 빼고 싶은 공정이다.
그렇게 번역 원고 전체를 원문과 대조해서 발견되는 오역의 비율은 전체 원고 중 1퍼센트쯤 될까? 물론 이 과정을 거쳐도 잡히지 않는 오역 또한 존재한다. 그것은 이미 그 문장을 해석한 기억이 생생히 살아 있어서 잘못된 부분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냥 내 번역이 옳은 것처럼 보이는 일종의 편향이 생기는 셈이다.
20퍼센트의 시간을 들여 완성도를 1퍼센트 향상한다? 번역이 인간의 생명에 직결된 일도 아니고 무척 비효율적으로 느껴진다. 벌이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애초에 번역은 보수가 그리 후한 직업이 아니다.
그래서 최근 나는 이 원문 대조를 이제 그만하면 어떨까 하는 유혹을 강하게 느꼈다. 오역이 얼마간 있더라도 인간적인 면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리화하면서. 그러나 단 1퍼센트 차이라 해도 품질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이래저래 고민하던 중에 다른 번역가들의 사정은 어떤지 알아보기로 했다. 다른 번역가들도 안 한다면 나도 안 해야겠다는 계산이었다.
오만했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나는 이 전문 대조가 나의 차별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네이버 주간번역가 카페에서 설문 조사를 실시했더니 전체 응답자 51명 중에서 전문 대조를 한다고 답한 번역가가 46명으로 약 90퍼센트를 차지했다. 처음에는 믿고 싶지 않았다. 이미 전문 대조를 중단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다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나만 안 할 수는 없다.
프리랜서는 품질에 대한 신뢰도가 생명이다. 이 사람에게는 믿고 맡길 수 있다는 신뢰가 잊어야 계속 일이 틀어온다. 내가 프리랜서 번역가로 17년 넘게 생존할 수 있었던 데도 아마 그런 신뢰가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내가 전문 대조를 중단한다고 해도 당장은 타격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번역 원고를 받으면 원문과 전부 대조하는 지독한(?) 편집자도 존재한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편집 과정에서 어딘가 찜찜한 기분이 들면 그 부분만이라도 원문과 비교해보는 게 편집자들의 기본적 태도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내 번역의 품질이 저하된 게 들통날 것이다. 그러면 일감이 줄어들고 결과적으로 소득이 줄어들겠지. 즉, 벌이를 늘리겠다고 노력을 줄였다가 벌이가 줄어드는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전문 대조를 지속할 수밖에 없다
그런 현실을 깨닫고 난 지금은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 그동안은 전문 대조가 손해라는 원망 비슷한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필수이자 기본이라고 생각하고, 기본이라면 득실을 따질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벌이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번역가가 작업에 충분히 공을 들였을 때 그만큼 금전적 보상이 주어지는 시스템이 존재하면 좋겠다. 어려운 일이긴 하다. 원고의 품질을 객관적으로 채점하긴 불가능하니까. 그렇다고 투입 시간을 기준으로 보수를 책정하는 것도 좋은 해법이라 보긴 어렵다. 실제 그 시간이 작업에 쓰였는지 확인하기 어렵고, 어디까지를 작업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도 존재하다. 예를 들어 자료 조사를 위해 책을 읽은 시간도 정산에 포함해야 할까? 실력이 좋아서 더 적은 시간을 들이고도 더 완성도 높은 번역 원고를 생산하는 사람에게는 불리한 조건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번역료가 오른다면 번역가가 고생하고도 보수를 보며 ‘현타’를 느끼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출판계의 현실에서 번역료를 올려준다면 얼마나 올려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데 곳간이 풍성히 채워지지 않으니 번역가에게 떨어지는 떡고물도 변변치 않다.
번역 원고의 분량을 기준으로 보수를 지급하는 매절 방식과 매출의 일정 비율을 지급하는 인세 방식을 결합한 형태가 해법이 될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1부 매출당 정가의 1퍼센트를 받는 인세 방식으로 계약하고 매절 번역료에 해당하는 금액을 계약금으로 지급하는 형태다. 일방적으로 번역가에게 유리한 방식이긴 하다. 하지만 번역가 없이는 번역 출판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상생을 위해 출판사에서도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만일 내가 출판사를 차린다면 지금 말한 것과 같은 형태로 번역가와 계약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출판사를 세울 계획이 없고 막상 돈을 주는 입장이 되면 마음이 바뀔지로 모른다.
어쨌든 벌이의 문제를 떠나서 번역 원고 전체를 원문과 대조하는 것이 번역가의 기본적 임무라는 것을 이번 기회에 확인했다. 이 바닥의 규범이라고 해도 좋겠다. 살아남으려면 따라야 하고, 어차피 따르려면 기분 좋게 따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