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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Aug 26. 2017

샘플 번역의 늪

출판사의 처분만 기다리는 시간

며칠 전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왔다. 지난주에 보낸 샘플 번역 원고와 관련된 일이었다. 샘플 번역이란 지난 글(번역가에게 필요한 것, 배짱과 비빌 언덕)에서 말했다시피 출판사에서 번역을 의뢰하기 전에 역자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의뢰를 맡길 책의 일부분을 번역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에이전시에서 전하길 출판사 사정으로 샘플 심사가 지연돼서 다음 주쯤에나 결과가 나올 예정이란다. 흠.


이 참에 내가 속한 에이전시에서 샘플 번역을 진행하는 절차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1. 출판사에서 에이전시에 번역을 의뢰한다. 이때 출판사에서 "OO 번역가님에게 맡기고 싶어요" 내지는 "OO 번역가님 샘플 받아보고 싶어요"라고 역자를 특정하지 않는다면 모든 소속 번역가에게 문자로 새로운 의뢰가 들어왔다고 통보된다.

2. 번역가들이 게시판에 들어가 대강의 정보(책 제목, 번역료, 마감 일정, 출판사에서 바라는 번역 스타일)를 보고 원하는 경우 샘플 번역에 지원한다.

3. 에이전시에서 샘플 번역을 진행할 번역가를 몇 명 선정해 통보한다.

4. 선정된 번역가들이 지정된 기한에 샘플 원고를 보낸다.

5. 출판사에서 샘플을 받아보고 마음에 드는 번역가가 있다면 그 번역가에게 일을 맡기겠다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또 다른 번역가들에게 샘플을 받아보겠다거나 의뢰를 철회하겠다고 에이전시에 알린다.


여기서 4번은 기한이 있지만(보통 3~5일) 5번은 기한이 없다. 출판사에서 신속히 샘플 검토를 마치면 하루 만에 번역가가 정해지기도 하고 보통은 1주일 안에 결정이 난다. 하지만 1주일이 지나도록 기별이 없는 경우도 왕왕 있다.


이렇게 샘플 심사가 하염없이 늦어지면 번역가로서는 손해다. 그동안에는 다른 샘플 건을 진행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A에게 사귀자고 해놓고 답을 듣기도 전에 B에게 사귀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기존에 지원한 샘플 건을 취소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취소하는 것은 내 신뢰를 깎아먹는 짓이다. 그리고 애초에 내가 지원하지 않았으면 샘플 번역을 진행할 수 있었을 다른 번역가의 기회도 빼앗아버린 셈이 되기도 한다.


반대로 빨리 결정을 내리지 않은 출판사에도 책임이 있지 않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출판사에는 또 출판사의 사정이 있겠지. 그리고 밥줄 끊길 소리는 애초에 안 하는 게 좋겠지.


님들아, 내 시간은요

그런데 이번 일로 또 얼마간 밥줄이 끊기게 생겼다. 하필이면 현재 작업 중인 책이 생각보다 진도가 빨리 나가서 예정보다 한 달이나 일찍 번역이 마무리되게 생겼는데 그게 바로 다음 주쯤이기 때문이다. 아직 그 후의 일은 잡히지 않았으니 되도록 빨리 다른 책을 의뢰받았으면 좋겠는데 이 놈의 샘플이 다음 주에야 결과가 나온다니 그냥 손 놓고 기다리는 수밖에.


그나마 샘플이 합격해서 바로 작업에 들어간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떨어지면 또 다른 책의 샘플 번역에 지원을 해야 할 텐데 언제 새로운 샘플 건이 들어올지도 미지수이고 그 결과가 언제 나올지도 알 수 없다. 자칫하면 샘플을 지원하고 결정을 기다리는 데만 또 열흘 이상이 걸릴지도 모른다. 이렇게 일이 끊긴다고 누가 소득을 보전해주지도 않고 샘플 번역은 따로 번역료를 받지도 않는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랴. 작업이 언제 끝날지 똑바로 예측하지 못하고 뒷일을 도모하지 않은 나를 탓해야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 자주 바깥양반(=아내)에게 핀잔을 듣는 것을 보면 나는 당최 계산적이고 용의주도한 삶은 글러먹은 주먹구구식 인간인가 보다.


좌우간에 출판사 님들아, 하루빨리 처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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