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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Sep 03. 2017

샘플 번역, 똑 떨어졌다

지난 글(샘플 번역의 늪)에서 말했던 샘플 건, 똑 떨어졌다. 그래도 결과가 목, 금요일은 되어야 나올 줄 알았는데 월요일에 통보를 받았으니 생각보다 빨리 처리가 된 셈이다.


내가 샘플 번역에서 떨어졌을 때 보이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1. "흥, 나 떨어뜨리고 얼마나 잘 되는지 두고 보겠다!"
샘플을 진행한 책이 마음에 들었는데 떨어지면 괜히 분하다. 출판사에서 샘플에 대한 피드백을 주는 경우가 거의 없으므로 왜 떨어졌는지를 몰라서 그러는 면도 있다. 그렇다고 아주 속에서 열불이 차오를 정도는 아니고 그냥 콧김 한 번 뿜을 정도의 분함이다.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그리고 내가 샘플에서 떨어진 책을 나중에 서점에서 만나면 괜히 반갑고 기왕이면 잘됐으면 좋겠다 싶어진다. 무플보다는 악플이 낫다고, 아예 모르는 놈보다는 미운 정이라도 있는 놈이 더 낫달까.

2. "휴, 십년감수했네!"
샘플을 해보니 책이 영 내 스타일이 아니었을 때다. 문체가 안 맞을 수도 있고 내용이나 전개 방식이 안 맞을 수도 있다. 여하튼 그런 책을 맡아서 고생하느니 차라리 떨어지는 편이 낫다. 그러면 애초에 왜 취향도 아닌 책의 샘플을 진행하겠다고 지원했냐는 말이 나올 수도 있겠다. 그런데 사람과 마찬가지로 책도 그냥 겉만 봐서는 모르고 일단 잠깐이라도 겪어봐야(실제로 번역을 해봐야) 그 성격이나 성향이 어느 정도 파악되는 법이다.

말하자면 샘플 번역은 일종의 소개팅이라고 할 수 있다. 출판사에는 과연 이 번역가가 쓸만한지, 번역가에게는 과연 이 책이 내게 맞는지 간을 보는 기회가 된다. 단, 출판사는 번역가를 거절할 수 있지만 번역가는 일단 샘플이 합격하면 작업을 거절할 수 없다. 물론 안 하겠다고 고집을 피울 수는 있겠지만 그런 식이면 앞으로 샘플 맡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샘플 번역에 지원하기 전에 책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와 앞 부분의 몇 페이지 정도는 읽어보고 지원 여부를 결정한다.


이번에 낙방한 책으로 말하자면 2번에 속했다. 문장이 마치 진심을 살짝 감춰 놓은 것처럼 어딘가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어서 내 취향이 아니었다(떨어졌으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는 솔직한 문장이 좋다. 그런 문장이 읽기도, 번역하기도 수월하니까. 뭔가 겹겹이 싸이고 빙 둘러가는 것 같은 문장은 해석에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과연 내가 제대로 해석을 했는가 하는 의문이 자꾸만 들러붙는다. 하지만 또 그런 해석의 묘미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다. (여담이지만 나라는 사람은 거꾸로 항상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습성이 있다. 언제라도 "아니, 나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라고 발뺌할 틈을 만들어두는 안전제일주의자다. 좀 치사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을 치사해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도 나만의 처세술이라면 처세술이다.)


솔직히 애초에 그 책이 나와 잘 맞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 몇 페이지 읽어보니 딱 감이 왔다. 그런데 왜 지원했을까? 출판사에서 제시하는 번역료가 평소에 내가 받는 금액보다 10퍼센트 정도 많았다. 앞자리 수가 바뀌어서 "이제 나도 4,000원 대 번역가야!"라고 큰소리칠 수 있게 해주는 금액이었다. 그러니까 돈에 눈이 멀어서 지원했다. 하지만 원래 투자도 도박도 크게 먹으려고 욕심 부리다 된통 당하는 법. 역시 안전이 제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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