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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Sep 27. 2017

중역의 즐거움

샘플 결과가 늦게 나오니 마니, 결국에는 똑 떨어졌느니 징징댔지만 이후 다른 책의 샘플이 합격해서 지난주부터 작업에 들어갔다. 이번 책은 스웨덴 사람이 쓴 대중 심리서.


영어에 스웨덴어까지 할 줄 아냐고 물으신다면 아닙니다, 못 해요. 스웨덴어 원서를 번역한 영어판을 다시 한국어로 옮기는 겁니다. 중역이라고 하죠.


예전에는, 그러니까 아직 초등학교가 국민학교이던 시절에는 영어 책을 일본어로 옮긴 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중역이 많았다면 요즘은 유럽권, 특히 북유럽권 작품을 영어에서 중역하는 책이 적지 않다. 북유럽 책의 보급이 늘어난 이유야 골방에서 번역만 하는 내가 알 길이 없다. 다만 그쪽 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보니 중역을 해줄 영어 번역가를 찾는 경우가 많아서 조금이나마 번역 물량이 늘어난 것은 번역가로서 반길 일이다. 물론 작품을 한 다리도 아니고 두 다리 건너서 만나게 되는 독자로서는 손해일지 모르나 또 중역이 아니라면 적당한 번역가를 구하지 못해 아예 그 작품이 국내에 소개되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 아주 손해인 것만은 아니라고 하면 제 코가 석 자인 자의 구차한 변명이 되려나.


나도 중역은 이번이 세 번째인데 중역은 또 중역 나름의 장점이 있다. 바로 오역 논쟁에 대한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워낙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까 영어 책을 번역할 때는 혹시라도 이 책이 대박이 터져서 많은 사람이 읽게 되고 그중에서 굳이 원서와 대조해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래서 혹시라도 책장 틈틈에 숨어 있던 바퀴벌레처럼 오역이 기어 나오면 어쩌나 하는 염려를 하게 된다.


뭐, 지금까지는 모두 기우였다. 왜냐하면 내 책은 누가 부러 오역을 찾아볼 만큼 잘나간 적이 없었으니까. 오역 검증도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책이나 이름만 들어도 다 알 만한 번역가나 누릴 수 있는 호사라면 호사다. 정말 오역 검증 한번 받아보는 게 소원이라고 해도 아주 과장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도 언젠가는 내 역서가 대박이 터질 것이라는 한줄기 희망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늘 오역 논란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한데 중역을 할 때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진다고 할 것이 굳이 원서를 찾아볼 만큼 그쪽 나라 말을 잘하는 사람이 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스웨덴어를 잘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았다면 애초에 이 책이 나한테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원서가 스웨덴 책인데 굳이 영어판을 뒤적여볼 사람도 많진 않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어딘가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감시자의 눈초리가 사라진 것 같은 홀가분함이 느껴진다. 그러면 좀 더 과감한 윤문을 시도해볼 수 있다. 그렇다고 원문(이 경우에는 영어판이겠지만)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문장을 만든다는 것은 아니다. 기존에 영어 책을 번역할 때는 내 나름대로 원문의 맛은 살리고 번역의 어색함은 줄인 의역이라고 생각하는 문장이 있어도 나중에 누가 "이건 번역자가 제멋대로 문장을 바꿔치기한 거 아냐?"라는 이의를 제기할까 싶어 지레 겁을 먹고 다시 원문에 근접한 문장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면 중역을 할 때는 그런 의역을 그대로 밀어붙일 여유가 생긴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원래는 원문에서 5센티미터만 떨어져도 겁이 나던 것을 10센티미터쯤 밀고 나갈 배짱을 부려본달까. 그래 봐야 겨우 5센티 차이지만서도.


그렇다고 또 번역을 날림으로 한다는 말도 아니다. 오히려 영어판 문장이 잘 이해되지 않으면 스웨덴어 원문을 찾아보는 꼼꼼함까지 발휘할 정도다. 며칠 전만 해도 영어판에 "have high ceilings"라는 구문이 나오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스웨덴어 원문을 보니 "högt i tak"이라고 되어 있길래 구글에서 검색을 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위키판 영어사전인 윅셔너리에 스웨덴어로 그 뜻이 설명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걸 또 번역해 보니 "누구나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분위기"라는 뜻의 관용구였다(언젠가 내 목에 칼을 들이밀지도 모를 놈이지만 그래도 이럴 때는 구글 번역기 만세).


이렇게 하루에도 수십 번 스웨덴어 원문을 찾아서 번역기에 돌리느라 번역 속도는 오히려 더뎌지는데도 어디 읽을 줄도 모르는 말로 된 책 속에서 지금 내가 번역하는 문장에 해당하는 부분을 찾아서 그걸 또 번역기에 돌려보고,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사전도 찾아보고 구글 검색도 해보고, 여하튼 그런다고 번역료가 확 뛰거나 나중에 누가 이 책을 스웨덴판과 비교해 볼 것도 아닌데 그렇게 시간 잡아먹는 짓을 하면서도 왠지 모를 짜릿함을 느끼는 걸 보면 나도 참 변태지, 변태. (그래도 이 책을 맡긴 출판사에서만큼은 나를 꽤 신뢰하는 분위기이니, 이렇게 변태의 골방에도 볕 들 날은 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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