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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Oct 19. 2017

왜 나를 그렇게 불러요

별로 영양가 없는 번역가의 호칭에 대한 이야기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왔다. 어느 출판사에서 나를 콕 집어서 리뷰 의뢰가 들어왔단다. 참고로 리뷰란 출판사에서 외서를 번역해서 출간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번역가나 번역가 지망생에게 부탁해서 시장성을 검토하는 과정을 뜻한다. 말하자면 '간' 보기. 시장 사정을 잘 아는 출판사 편집자가 직접 읽어보면 좋을 테지만 아무래도 그들은 바쁘기도 바쁜 데다 모든 편집자가 외국어에 능한 것은 아니다 보니 이렇게 제삼자에게 의뢰하는 경우가 많다.


나로 말하자면 번역가 지망생이던 10년 전에 몇 번 리뷰를 한 이후로는 아주 손을 뗐다. 왜냐하면 이게 귀찮긴 아주 귀찮고 돈은 별로 안 되는 일이거든. 리뷰라고 하면 그냥 서평을 쓰는 게 아니라 책의 내용을 장 별로 요약하고 샘플 번역도 하고 장단점과 시장 현황까지 분석해서 A4 10장 내외의 결과물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자면 아무리 빨리 해도 책 읽는 데 하루, 검토서 작성하는 데 하루, 꼬박 이틀이 걸린다. 더욱이 나는 책 읽는 속도마저 느려서(종일 글을 끼고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천형과 같다) 암만 속도를 내도 이틀 만에 끝내질 못하는데, 그러고서 받는 돈이 10년 전에는 10만 원이던 게 이번에 보니 5만 원이 더 올라서 15만 원이 됐지만 타산이 안 맞긴 매한가지. 못 해도 그 두 배는 줘야 그나마 본전치기다.


여하튼 리뷰란 그런 것이고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서 에이전시에서 출판사로부터 받은 의뢰 메일의 일부를 내게 보내줬다. 일단 그 내용을 한번 보시라. (출판사 이름이 노출되는 것도 아니니까 이 정도는 공개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나도 어느 출판사에서 의뢰했는지 모른다.)


작년에 OOO 씨가 번역한 <*****>을 쓴 작가의 신작입니다.
OOO 씨가 리뷰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전작을 번역하신 입장에서 읽어봐주시면 저희는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이걸 읽고 내가 제일 처음 보인 반응은…… '이씨, 이런 괘씸한!'이었다. 아니, 뭐가 그리 괘씸하냐고? 몰라서 물어요? 저기 저렇게 뻔히 나와 있는데?


나보고 OOO '씨'라잖아! 물론 나한테 직접 보낸 건 아니지만 어쨌든 감히 나를 OOO '씨'라니!


이게 무슨 미친 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번역가라면 또 고개를 끄덕일지 모른다. 내가 (속으로) 저 난리를 친 이유는 사실 무척 어처구니가 없는데 출판계에는 번역가를 선생님, 역자님으로 부르는 관행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선생님 대접받다가 씨라니까 씨씨 거린 거지.


이 내면의 갑질 아닌 갑질에 나도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내가 처음 선생님이란 소리를 들었을 때가 생각났다. 통산 세 번째 책을 번역해서 출판사에 넘기고 며칠 지난 시점이었고 장소는 동네 목욕탕 탈의실이었다. 시원하게 씻고 나와 옷을 입는데 어디서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OOO 선생님이시죠?"란다. OOO은 맞지만 선생님은 아닌데 뉘신지, 라고 묻기 전에 그쪽에서 이번에 그 책을 맡은 편집자라고 했다. 번역과 관련해 문의할 게 있어서 전화를 했다는데 계속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아직 20대 후반으로 그런 호칭이 어색한 것을 넘어 황송하기까지 했던 나는 벌거벗은 남자들 속에서 팬티 바람으로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전화를 받았다.


그랬던 내가 10년 만에 이렇게 변하다니 다들 이렇게 갑이 되어 가는 것인가, 라기에는 아직 내가 출판사에 끗발이 서는 끕은 아니지만.


그러고 보면 나도 똑같은 결례를 범한 적이 있다. 상대는 내가 속한 에이전시에서 몇 년 전까지 일했던 분인데 나는 OOO 팀장님이라는 근사한 호칭을 놔두고 매번 OOO 씨라고 불렀다. 그분은 꼬박꼬박 나를 역자님이라고 높여 불렀으나 나는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뭘 몰라서 몇 년간 그렇게 씨씨 거렸다. 학교 졸업하고 바로 번역 전선(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치열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지만)에 뛰어든 탓에 사회생활다운 사회생활을 안 해봤으니 뭘 알았겠는가.


그런데 또 듣자 하니 요즘 사회에서는 직급을 빼고 그냥 OOO 님이라고 부르는 조직이 늘어나는 분위기라던데 여하튼 나는 씨보다 님이 듣기 좋다. 다만 번역료 많이 주는 사람이라면 씨라고 불러도 환영이다. 말이 나온 김에 기준을 정하겠다. 장당 4,000원 이상 줄 사람은 씨라 불러도 좋고 그 밑으로는 무조건 님으로 부르시라. 10,000원이면 씨고 님이고 다 떼고 그냥 이름만 불러도 좋고 "어이, 김 씨"라 해도 좋다. 단, 이건 2017년 기준이고 2018년이 되면 그때 내 몸값에 맡게 다시 기준을 책정하겠다. (물론 농담입니다. 씨든 님이든 열심히 합니다. 위에서 말한 리뷰도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요. 예, 예, 맡겨만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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