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드라마 <나르코스>와 영화 <아메리칸 메이드>를 재미있게 봤다. 둘 다 콜롬비아 마약상들에 얽힌 이야기인데 공통적으로 주는 교훈이랄까, 메시지 중 하나는 일단 한번 선을 넘으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 나쁜 짓만 아니라 좋은 뜻으로 하는 일마저도.
나도 번역가로서 그렇게 선을 넘어버린 게 있다. 원문 대조질이다. 번역 원고의 모든 문장을 원문과 대조하는 짓거리다. 이게 왜 ‘질’이요 ‘짓거리’냐 하면 너무 귀찮은데 딱히 벌이에는 도움도 안 되고 아주 가끔은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자괴감마저 들기 때문이다.
아니, 원고를 통째로 원문과 대조하는 건 번역가라면 누구나 다 하는 것 아니냐고? 안 돼, 그러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게 나 같이 몇 안 되는 번역가만 하는 특별한 수고여야만 하늘이 내 정성을 갸륵히 여겨서 조만간 대박 베스트셀러 하나 터지게 해줄 텐데, 누구나 다 하는 거면 얘기가 달라지잖아.
나라고 처음부터 이 짓을 했던 것은 아니다. 원래는 번역 원고만 읽다가 흐름이 원활하지 않고 툭툭 걸리는 부분에 한해서 원문과 비교해봤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마음 한구석이 켕기는 것이다. 만약에 내 역서가 베스트셀러가 돼서 누가 원문과 비교해보고 오역 투성이라고 욕하면 어쩌지? 처음에는 에이, 그럼 그때 가서 대충 둘러대지, 했지만 생각해보니까 나는 둘러대는 것도 잘 못하잖아?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순전히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번역문 전체를 원서와 대조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 내 역서를 낱낱이 뜯어보고 오역을 논하는 일은 여지껏 없었습니다. 하아, 그것은 어디까지나 베스트셀러 번역가들만 누릴 수 있는 영광. 감히 저 따위가 그런 걸 걱정하다니요.
하지만 원래 담배를 한 번도 안 피워본 나 같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피워본 사람은 없는 것처럼 이 원문 대조질도 한번 손을 대면 끊을 수가 없다. 내 번역의 민낯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원고가 오역이 득시글대는 그런 난잡한 수준은 아니지만 원문과 대조해보면 곳곳에서 겸연쩍게 웃으며 슬그머니 기어 나오는 오역들이 반드시 있다. 이런 놈들은 발각 즉시 다시는 내 번역에 발 붙이지 못하게 조져버려야지! 하지만 완전히 박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이 그랬다, 문제를 만든 사고방식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이미 내 머릿속에는 원서의 각 문장에 대한 해석이 저장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문장을 보든 기존의 해석이 눈 앞에 연막을 쳐서 원문을 제대로 읽지 못하게 한다. 그 연막을 걷어내려면 내 기억을 걷어내야 하는데 내 뇌 세포들이 무슨 USB 드라이브처럼 뺐다 끼웠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다 쓴 원고를 서랍에 처박아뒀다가 몇 주 후에 다시 읽어보고, 또 몇 주 후에 다시 읽어보라고 했다. 원고가 기억에서 어느 정도 잊혔을 때 새로운 눈으로 보라는 것이다.
번역 원고도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책 한 권을 2~3달 만에 끝내야 하는 상황에서 그런 여유는 무리. 그러므로 번역가 스스로 하는 원문 대조란 기존의 해석이 뻗치는 마수랄까, 이른바 ‘지식의 저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뻔히 알면서도 날마다 원문 대조의 바위를 오르막으로 굴리는 시시포스, 라고 하면 방구석에서 자판이나 두드리는 주제에 너무 거창한 비유겠지만 여하튼 이 원문 대조질은 지겹고 수고롭고(이미 한 번 본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프레임별로 뜯어본다고 생각해보시길)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는 한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일이다.
그놈의 베스트셀러 타령. 하지만 내 역서가 대박이 나야 나도 유명해지고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내 한정된 시간을 사려는 출판사가 늘어나면서 내 몸값도 비싸져서 내 꿈인 일 조금만 하고 맨날 놀고먹기를 실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안 그래도 현재 책 한 권을 번역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 중 약 30퍼센트를 원문 대조에 쓰느라 벌이가 시원찮은데 말이다.
그러면 만약에 과거로 돌아가 원문 대조의 세계로 넘어가는 선 앞에 다시 서게 된다면? 비트코인 1달러 할 때 3000개만 사겠습니다. 어차피 못 돌아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