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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Jan 04. 2018

번역으로 월 300이 가능할까

왜 월 300이냐고 물으신다면 글쎄요, 그 정도면 많이 버는 거니까요?


잔말 않고 바로 계산 들어간다.


출판 번역가는 대부분 매절로 계약한다. 번역 원고 1장에 얼마 하는 식이다. 책이 많이 팔리든 적게 팔리든 딱 정해진 금액만큼 받는다. 정확한 통계 자료는 없지만 내 경험에 비춰볼 때 현시점에서 일반적인 번역료는 장당 3,500~4,000원 수준이다. A4 1장에 겨우 그 정도 받는다고? 다행히 A4가 아니라 원고지다. 아니, 21세기에 접어든 지도 15년이 훌쩍 지났는데 여태 원고지를 써? 아니요, 한컴 한글에서 계산해주는 장수를 기준으로. 왜 굳이 원고지인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여하튼 그렇다. 여기서는 장당 3,800원으로 치자.


자, 그러면 하루에 몇 장을 번역하는지를 알아야 일당이 나오고 월 소득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책의 난이도에 따라 하루에 원고지 35~55장 정도를 번역한다. 넉넉히 50장을 번역한다고 치면 하루에 벌어들이는 번역료는 3,800원 x 50장 = 19만 원이다. 그러면 한 달에 며칠을 일할까. 회사원처럼 근무 일수가 딱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주 5일로 4주, 총 20일을 일한다고 치자. 그러면 한 달 소득은 19만 원 x 20일 = 380만 원.


물론 이건 세금을 떼기 전 액수다. 프리랜서 번역가는 명목상으로 사업자지만 실상은 유리지갑이다. 출판사에서 번역료를 지급할 때 나보다 한발 앞서서 소득세 3.3퍼센트를 납부하고 남은 돈을 건네준다. 380만 원의 3.3퍼센트면 125,400원. 그러면 세후 3,674,600원이다(나는 여기서 에이전시 수수료로 5퍼센트가 추가로 나가지만 출판사와 직거래를 하는 번역가가 더 많으니까 이 부분은 계산에 넣지 말자).


이렇게 세후 3,674,600원이 내 계좌로 입금된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냐 하면 아닙니다, 국민연금하고 건강보험료 내야죠. 정해진 날에 통장에서 얄짤없이 빠져나간다. 직장인은 본인이 절반, 사업주가 절반을 부담하지만 프리랜서는 모두 자기부담이다. 세전 소득이 380만 원이면 국민연금 보험료는 그 9퍼센트인 342,000원이다. 건강보험료는 직장인과 달리 소득만 아니라 재산까지 더해서 계산되기 때문에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여기서는 간단히 25만 원이라고 치자. 그러면 국민연금과 건강보험료로 60만 원 정도가 나가는 셈이다.


그러면 어디 보자, 3,674,600에서 600,000을 빼면... 3,074,600원, 어라, 뗄 거 다 떼고도 300이 되네?


근데 왜 나는 요 모양 요 꼴이지?


여기에는 몇 가지 함정이 있다.


1. 매일 원고지 50장 분량을 번역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 저자가 글을 정말 잘 써서 문장이 술술 읽히고 딱히 자료 조사가 필요하지 않은 책이라면 하루에 50~60장은 거뜬히 번역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번역을 해보면 그런 책은 5권 중 1권 정도다. 나머지 책들은 그때그때 자료를 찾는다고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여기서 이 말이 왜 갑자기 튀어나와, 이게 기다는 거야, 아니다는 거야, 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문장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서 애를 먹이기도 한다. 자료 조사야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지만 저자가 문장을 요상하게 써서 10분, 20분씩 고민하고 앉아 있자면 속에 참을 인 자가 마구 새겨진다. 미안, 거짓말입니다. 그냥 씨발거리고 만다. 뭐, 어차피 나 혼자 일하는데 누가 듣는 것도 아니고.


2. 한 달에 20일을 번역에만 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책 한 권을 번역하려면 실제로 원문을 한 자 한 자 우리말로 옮기는 좁은 의미의 번역만 필요한 게 아니다. 일단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봐야 한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책 읽는 속도가 느린 편이라 여기에 꼬박 하루가 걸린다. 그리고 온라인에서 짤막한 글을 읽는 것만으로 자료 조사가 충분치 않을 때는 직접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관련 도서를 찾아와서 읽느라 시간이 소요된다. 번역 원고를 넘기기 전에 최종적으로 원고를 검토하는 시간도 필요한데 내 경우에는 여기에도 최소 이틀이 걸린다. 그 밖에 출판사에서 역자 교정과 후기를 요청하고 마케팅에 쓸 자료를 조사해 달라고 부탁해 오는 경우도 있다. 이것도 최소 하루는 잡아야 하는 일이다. 요컨대 모든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번역 원고를 작성하는 데 쓸 수는 없다는 말이다.


3. 한 달에 꼬박 20일을 일하는 것은 또 다른 이유로도 쉽지 않다. 번역 일감이 줄줄이 이어져서 바로바로 다음 작업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 일을 하다 보면 그렇게 일감이 몰릴 때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책 한 권을 끝내고 다음 책을 시작하기까지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 정도 일이 없는 시기도 있다. 그리고 명절에 집에 다녀온다고, 연휴에 어디 간다고 며칠씩 쉬면 당연히 그동안은 벌이가 없다. 프리랜서에게 유급 휴가란 성냥팔이 소녀가 보는 남의 집 저녁 식사 풍경 같은 것이다. 거기다 내 경우에는 주부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집안일을 챙기거나 바깥양반(=아내)을 내조하느라 일을 못하는 날도 종종 생긴다. 물론 부지런한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한 달에 정해진 일수만큼 일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사주에 나오길 원체 한량 팔자라!


여하튼 이런 이유로 세후 300은 남들은 몰라도 내게는 아직 남의 이야기다. 가끔 돈독이 올라서, 혹은 내 손가락이 머리를 건너뛰고 저자와 직거래라도 튼 것처럼 마구마구 번역문이 써지는 책을 만나서 그만큼 벌 때도 있긴 하지만 평균적으로 치면 월수 300이 안 된다. 뭐,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바깥양반(=아내)이 벌어 오니까. 결혼할 때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호강하게 해주겠다는 허튼 약속을 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대신 날마다 따뜻한 저녁상을 차려 놓고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약속은 되도록 안 하는 게 최고다.


결론, 번역으로 월 300 가능하다. 단, 아직 나와 당신의 이야기는 아닐 수 있다. 그러니 여러분, 맞벌이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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