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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Jan 19. 2018

번역가라고 다 쏼라쏼라하진 않아요

-무슨 일 하세요?

-번역갑니다.

-무슨 언어요?

-영어에서 한국어요.

-오, 그럼 영어 잘하시겠네요?


나를 번역가라고 소개하면 거의 예외 없이 돌아오는 반응이다. 그러면 나는 예외 없이 “그냥 조금……”이라고 얼버무린다. 어디서 겸손을 떨어, 라고 생각해주신다면 감사하지만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아니, 영어 번역으로 먹고사는 인간이 영어를 조금밖에 못하는 게 말이 되냐 싶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닌 게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잘한다’의 기준은 외국인과 쏼라쏼라 대화를 나눌 정도로 유창한 스피킹 실력을 뽐내는 것이지만 나는 읽을 줄만 알지 말할 줄은 모르기 때문이다.


책 많이 읽는다고 말 잘할 것 같으면 나는 한 손으로 이 사람의 마음을, 다른 한 손으로는 저 사람의 마음을, 거기에 양발까지 동원해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까지 사로잡고 허공에 마구 던져서 받는 기똥찬 저글링을 선보이다가 모두 차라락 제자리에 돌려놓고 우렁찬 박수를 받는 가히 언변의 마술사일 것이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렇겠고.


하지만 읽는 것과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말도 해 버릇해야 는다. 그런데 한국에 살면서 영어로 말할 일이 얼마나 있을까. 더욱이 종일 혼자 집에서 일하는 나 같은 사람은 영어는커녕 한국어로도 말을 별로 안 한다.


내 영어 스피킹 실력이 최고조였을 때는 단연 대학 시절이었다. 전공이 영어영문학이니 당연히 영어로 듣고 말하는 수업이 많았다. 영어 실력 키우겠다고 일부러 그런 수업을 골라 듣기까지 했다. 그때 나를 잘 아는 외국인 교수님이 그랬다. 외국 안 나간 녀석 치고는 아주 쓸만한 수준이라고. 꼬아 듣자면 외국물 좀 먹은 애들한텐 못 비빈다는 뜻.


영어로 말을 잘하려면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재지 말고 일단 말을 지르고 봐야 한다는데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배운 게 있어서 할 말을 미리 문법에 끼워 맞추느라 시간이 걸리기도 하지만 원래가 일단 머릿속에서 말을 다 만들어 놓고 입 밖으로 내는 성격이라 그냥 되는 대로 말을 던지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니 그냥 길을 묻거나 음식을 주문하는 것처럼 짧은 말 정도는 곧잘 해도 생각을 길게 말하려면 더듬대기 일쑤다. 더듬댈지언정 표현은 잘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좀 복잡한 내용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그냥 입을 꾹 다물고 씩 웃거나 고개만 끄덕이곤 한다.


상황이 이러니 내가 제일 두려운 건 내가 번역한 책이 대박을 쳐서 작가가 한국을 찾는 것이다. 설마 나한테 통역을 맡기는 악랄한 출판사는 없(어야하)겠지만 꼭 그런 게 아니라 작가와 같이 식사를 한다든가 해서 진득하게 대화를 해야 할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래도 평소에 워낙 경청하는 '척'의 기술을 잘 연마해 놓아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도 눈은 진지하게 상대방을 바라보고 고개는 적당이 끄덕여주는 게 몸에 뱄으니 어떻게 최대한 말 안 하고 듣는 척하면서 버텨보겠지만 그런 자리에서 입에 박음질한 사람처럼 마냥 조용히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인데, 입을 여는 순간, 어버버버하는 나를 보며 다들 뭐라 생각하겠는가.


작가는 ‘아니, 저렇게 영어를 못 하는 놈이 내 소중한 책을 번역했다고? 순날림으로 한 거 아냐?’라고 생각할 테고, 출판사는 “하하, 이 사람은 진짜 번역가가 아니었습니다! 진짜 번역가 선생님이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대타로 꿔다 놓은 보릿자루였습니다!”라며 상황을 무마하고 싶지 않을까.


그때 내가 보란 듯이 은신술을 펼쳐서 정말로 보릿자루만 남기고 감쪽같이 사라진다면 작가는 동양의 신묘한 무예에 감탄하며 나를 훌륭한 닌자로 기억하겠지.


그럼 나는 이만 술법을 연마하러…….


잠깐, 떠나기 전에 이런 시답잖은 글을 여태 읽고 있었던 자신을 표창으로 찌르고 싶을 당신을 위해 내가 예전에 영어 듣기와 말하기 실력을 키워보겠답시고 썼던 방법을 전수하겠다. 때는 내가 동사무소 공익으로 일하면서 살이 피둥피둥 쪄서(하지만 지금보다 날씬했다!)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저녁마다 훌라후프를 돌리던 시절이었는데, 그 시간을 의미는 둘째치고 재미있게 때우기 위해 생각했던 게 영어 시트콤을 보는 것이었다. 방법은 간단하다. 단, 이 방법은 기본적인 듣기 실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단점이 있다.


1. 시트콤 <프렌즈>의 한 에피소드를 자막 없이 본다.

2. 다음 날 같은 에피소드를 자막을 켜고 본다.

3. 또 다음 날 같은 에피소드를 자막 없이 본다. 그러면 처음에 안 들리던 말이 들릴 것이다.

4. 3번과 같이 해도 좋고 아니면 또 다음 날 자막을 켜고 해고 좋은데, 배우들이 하는 말을 되는 대로 따라 말한다. 대충 얼버무려도 좋고 내가 말하는 중에 다음 대사가 나오면 그냥 넘어가도 좋다.


꼭 <프렌즈>일 필요는 없지만 내가 지금까지 본 미드 중에서 <프렌즈>만큼 말이 쉽고 또 취향을 덜 타는 작품이 없었다. 나는 그때 시즌 1~3 DVD를 사서 무지하게 돌려봤는데, 얼마나 많이 봤는지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지금 늦깎이로 <프렌즈>에 입문한 아내가 보는 걸 가끔 옆에서 듣고 있으면 그때 그 장면과 대사가 새록새록 떠오를 정도다.


이 방법으로 꼭 영어 실력이 향상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영어는 안 남아도 <프렌즈>는 남는다. 그게 인생에 뭔 보탬이 되냐고 물으시면 뭐, 딱히 할 말은 없지만서도. 세상만사가 다 영양가 있을 순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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