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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 Jul 09. 2019

심심풀이로 원서를 읽었습니다.

젊은 번역가의 공부 습관 (1)

“너희 중에는 나중에 영문과 나왔다는 게 부끄러울 사람도 있을 거야.”


대학교 2학년 때, 한국 축구가 월드컵 4위라는 역사적 기록을 만들어내며 온 나라가 들썩인 후 다시 일상의 고요가 돌아온 어느 나른한 가을날, 강의실의 고요를 깬 교수님의 일성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분명히 영어로 쓴 것은 맞는데 기존의 문법 지식으로는 도무지 해석이 안 되는 영시를 두고 교수님이 던진 질문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뭐라고 한마디라도 하는 학생이 없으니 답답하셨겠지요. 그래서 웃는 얼굴로 지독히도 차분히 독설을 날렸습니다.


그때 뜨끔했던 학생이 아마 저뿐만은 아니었을 거예요. 영문과 출신이라면 공감할 겁니다.


밖에서는 영문과라고 하면 원어민처럼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할 줄 알지만 실제로는 원어민 앞에만 서면 머릿속은 새하얀 백지가 되고 속은 새카만 먹지처럼 타들어가면서 관자놀이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다는 것을요.


그 학기를 마치고 이듬해 봄에 저는 2년여의 공익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남들은 군대에서 어머니와 짜장면을 그리워하며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청춘의 한 시절을 써 내려갈 때 저는 어머니가 해주시는 따끈따끈한 밥 먹으면서 동사무소 민원실에서 주민등록 등초본을 뗐어요.


제가 근무하는 동사무소는 민원인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밀어닥치는 오전과 오후의 한때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한가했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민원실 뒤편의 컴퓨터 앞에 앉아 웹 서핑으로 무료한 시간을 때웠는데요,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든 겁니다.


‘아, 이제 인터넷도 재미없다. 어차피 지겨울 거면 뭐라도 의미 있게 지겨울 만한 게 없을까?’


그때 저 교수님의 말씀이 불현듯 떠올랐던 것도 같습니다. 저는 어차피 책상에 앉아 있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도 없으니 영어 원서나 읽어보자는 기특한 다짐을 하게 됩니다. 정말 어지간히도 심심했던가 봐요. 영문과생임에도 생전 읽지 않던 영어 책을 다 읽을 생각을 하다니 말이죠.


그래서 처음으로 도전한 책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였습니다.


남들은 초중학교 때 떼는 책을 저는 스물두 살이 돼서야 읽었어요. ⟪어린 왕자⟫를 선택한 이유는 순전히 문장이 만만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애들이나 읽는 책이니까 나도 충분히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거죠.


큰 착각이었습니다. ⟪어린 왕자⟫는 애들이나 읽는 책이 아니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찔끔 나오려 하는 눈물을 누구한테 들킬까 꾹 참았을 리가 없죠.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안 하겠지만, 그 후로 제 인생 최고의 책은 언제나 ⟪어린 왕자⟫입니다.


아, 읽는 건 예상대로 쉬웠어요. 문장이 간결하고 어휘도 친숙했거든요. 덕분에 저의 원서 읽기 프로젝트는 순조롭게 시작됐습니다. ⟪어린 왕자⟫가 프랑스 작가의 책이니까 엄밀히 따지면 영문판이 ‘원서’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요.


이후로 공익 생활을 마칠 때까지 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영어 원서를 족히 서른 권은 읽은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났더니 웬만한 영어 책은 다 읽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더군요.


그렇게 저는 적어도 독해력에서만큼은 “영문과를 나왔다는 게 부끄러울 사람”이 생길 거라는 교수님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게 번역가가 되는 밑거름이 됐고요. 



번역가에게 제일 중요한 자질이 바로 원문을 독해하는 능력

번역가의 공부 습관을 말하는 첫 번째 글을 이 이야기로 여는 까닭은 번역가에게 제일 중요한 자질이 바로 원문을 독해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원문을 똑바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국어로 그 비슷한 문장이라도 쓰지요.


비유하자면 시력이 0.2인 사람이 안경 없이 김태희를 보고 그린다면 그 그림 속의 여인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한들 김태희가 아니라 상상 속의 인물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독해력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요?


원서를 많이 읽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단어를 외우고 문법을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독해력이 저절로 길러지지 않아요. 축구로 치자면 공을 찰 줄 알고 달릴 줄 안다고 무조건 좋은 선수가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실제로 경기를 뛰면서 언제 어떻게 달리고 어떻게 공을 차야 하는지 실전 감각을 익혀야죠. 원서 읽기가 바로 그 실전입니다.


원서를 읽고 싶은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제가 정해드리죠.



⟪어린 왕자⟫를 읽으세요.


말했다시피 쉽습니다. 분량도 짧아서 100쪽이 안 되는 데다 그림이 많아요. 입문자용으로 제격이죠.


물론 꼭 ⟪어린 왕자⟫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들어가면 렉사일(Lexile) 지수라는 어휘력 평가 지수를 기준으로 단계별로 분류된 영어 원서를 검색할 수 있어요.


여기서 괜찮겠다 싶은 책을 고르셔도 됩니다. 참고로 이 지수에 따르면 ⟪어린 왕자⟫는 초등학교 3학년 수준이면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원어민 기준으로요.


책을 읽다가 낯선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아봐도 좋고 대충 이런 뜻이겠지, 하고 넘어가도 좋습니다. 그렇게 쭉 읽어보세요. 이때 결과는 두 가지겠죠.


아무리 읽어도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되지 않아서 중도에 하차하거나, 완벽하진 않더라도 적당히 이해하며 끝까지 다 읽거나. 중도에 하차했다면 유감스럽게도 아직 문법 지식이 부족한 것입니다. 이때는 일단 문법 공부부터 하시는 게 좋습니다.


어휘력이 부족하면 그때그때 사전을 찾으면 되지만, 문법적 기초가 부족할 때는 그런 임시방편이 통하질 않습니다. 어디서 뭘 찾아야 하는지 모르니까요.


⟪어린 왕자⟫를 끝까지 다 읽으셨습니까?


축하합니다. 본격적으로 원서를 읽을 준비가 끝났습니다. 문장을 다 이해하지 못했어도 상관없습니다. 그건 앞으로 꾸준히 원서를 읽으면서 문법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문법 공부는 강의나 책을 통해 체계적으로 하면 제일 좋은데요, 그게 영 귀찮다 싶으면 그때그때 인터넷 게시판이나 주변에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에게 이 문장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냐고 물으면서 야금야금 익히는 방법도 있습니다.



⟪어린 왕자⟫ 다음으로는 무엇을 읽으면 좋을까요?


⟪어린 왕자⟫를 다시 읽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처음 읽을 때는 이해되지 않았는데 다시 읽으니 이해되는 문장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책 한 권 읽었다고 벌써 독해력이 향상된 겁니다!


한 번 본 책은 다시 안 보는 성격이라면 바로 성인 도서로 넘어가도 되고, 아직은 그게 좀 부담스럽다 하면 아동이나 청소년 서적을 좀 더 읽어봐도 좋습니다.


알라딘에서 등급별로 분류해 놓은 책 중에서 골라도 좋고 아마존에서  ‘kids book’이나 ‘ya book’이라고 검색하면 아이들용 책이 끝도 없이 나옵니다. 참고로 ‘ya’는 ‘young adult(청소년)’의 약자입니다.



애들 책이든 어른들 책이든 선정 기준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내 관심 분야의 책.


둘째, 베스트셀러.

 


반드시 관심 분야의 책이어야 합니다. 한국어로도 안 읽을 책을 영어로 읽겠다고 하면 읽힐 리가 없거든요.


다음으로 왜 베스트셀러를 추천하느냐? 대중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읽을 만한 수준이라는 거죠.


물론 여기서 누구나란 원어민 기준이겠지만요. 그래도 영어권 대중이 읽을 수 있는 수준이라면 문장도 내용도 너무 어렵진 않을 겁니다. 그만큼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이 읽기에도 유리하겠죠.


참고로 분량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습니다.


원래 뭐든 처음 시작할 때는 ‘아, 또 한 건 했다!’ 하는 성취감이 중요하니까요. 제 경험에 비춰보면 일단 많이 읽는 게 장땡이에요.


다 읽은 책이 한 권씩 쌓이면서 다양한 영어 문장에 익숙해지고 문맥으로 문장의 의미를 추리하는 능력이 길러지면 처음에는 어디서부터 해석해야 할지 몰랐던 복잡한 구조의 문장이 ‘어라, 혹시 이런 뜻인가?’ 하고 이해되는 시점이 반드시 옵니다.


(물론 번역할 때는 그렇게 감으로 해석하면 절대 안 되겠지만 배우는 단계에서는 그렇게 감을 익히는 게 실력 향상에 도움이 돼요.)


많이 읽는 게 중요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모르는 단어는 사전을 찾아가며 읽어야 할지 궁금하실 거예요.


답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평소에 뭔가 꼼꼼히 찾고 정리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면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보는 것도 좋겠고요, 단어 하나하나 따지면서 읽는 게 재미없다면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크게 문제가 없는 선에서 적당히 넘어가도 좋습니다. 참고로 저는 후자였어요.


큰 맘 먹고 원서를 샀는데 손이 잘 안 가는 분도 있을 거예요. 그럴 때는 한번 생각해보세요.


① 손이 잘 안 가는 곳에 원서가 있진 않은가? 원서는 평소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 그 안에서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놔두세요. 외출할 때는 지갑과 함께 챙기시고요.


② 책이 재미가 없는 건 아닌가? 앞에서 관심 분야의 책을 선택하라고 했는데요, 그런다고 모든 책이 재미있을 수는 없겠죠. 재미가 없는 책은 그냥 덮어버리고 다른 책을 찾아보세요. 책은 원래 심심풀이로 재미 삼아 읽을 때 제일 잘 읽힙니다.


③ 모름지기 원서란 책상 앞에 정좌하고서 경건히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진 않은가? 아니에요. 원서고 아니고를 떠나서 책은 원래 막 읽어야 제맛입니다. 소파에 누워서 읽어도 좋고, 화장실에서 부들거리는 손으로 읽어도 좋아요. 책상이 싫으면 절대 책상에 앉지 마세요. 저는 주로 침대에 모로 누워서 봅니다.



자, 정리해볼까요.


1. 일단 ⟪어린 왕자⟫(혹은 그와 비슷한 수준의 쉬운 책)로 시작한다.


2. 이후의 책은 관심 분야의 베스트셀러 중에서 고른다.


3. 형식과 방법에 구애받지 않고 내키는 대로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막 읽는다.


어때요, 참 쉽죠?


네, 안 쉬운 거 알아요. 남의 나라말로 책 읽는 게 쉬울 리가 있나요. 처음부터 무리하진 말고 하루에 5쪽, 그것도 안 되면 2쪽씩 읽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하세요.


중요한 건 꾸준함이고, 뭐든 꾸준히 하려면 만만해야 합니다.




※팁

원서 한번 주문하면 배송에 일주일 넘게 걸려서 불편해요, 글씨가 너무 작아서 눈이 빠질 것 같아요, 너무 비싸요, 이런 불만이 있다면 전자책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아마존에 들어가서 책 소개 페이지를 보면 페이퍼백과 하드커버 외에 킨들(Kindle)이라는 형태가 보일 거예요. 아마존 전용 전자책 포맷입니다.


구입하면 바로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의 킨들 앱으로 내려받아서 읽을 수 있어요. 서체와 글씨 크기도 자유롭게 조정 가능하고 가격도 대체로 종이책보다 저렴합니다.


스마트폰은 눈이 아프다고요? 그러면 전자잉크를 탑재한 전용 리더를 이용하면 됩니다. 전자잉크는 종이처럼 눈이 덜 피로하게 만들어진 디스플레이입니다. 제가 10년쯤 쓰고 있는데 스마트폰보다 훨씬 눈이 편해요.


아마존에서 ‘kindle reader’로 검색하면 여러 기종이 나오는데, 2019년 7월 현재 기준으로 기본형인 ‘All-new Kindle’이면 책 읽기에 충분합니다. 가격이 부담되면 중고장터에서 ‘킨들 페이퍼화이트’ 구형을 구해보세요.





*질문과 의견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이 글은 네이버 포스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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