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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Jul 25. 2019

덕질로 번역을 공부했습니다

젊은 번역가의 공부 습관 (3)

<젊은 번역가의 공부 습관>이 새로운 제목으로 2020년 4월 11일 출간될 예정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해보고 싶습니다> 텀블벅 펀딩 바로 가기




“번역 공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많은 번역가 지망생이 고민하는 문제입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영어 독해력을 기르려면 원서를 많이 읽으면 되고, 글솜씨를 기르려면 글을 많이 쓰면 되듯이 번역 실력을 기르려면 번역을 많이 해보면 됩니다.


번역 공부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혼자서 공부하는 것과 함께 공부하는 것.



혼자서 하는 번역 공부

먼저 혼자서 하는 공부에 대해 얘기해보죠. 혼자서 어떤 텍스트를 정해서 번역해보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인터넷 기사나 블로그 포스트를 번역하는 거예요. 무엇을 번역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번역가가 되면 어떤 텍스트든 번역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제 얘기를 하자면 다시 2000년대 초반 공익 시절로 돌아갑니다. 그때 웹브라우저 파이어폭스가 세상에  처음 나왔어요. 지금은 후발 주자인 구글 크롬에 밀렸지만 당시만 해도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대항마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파이어폭스의 최대 강점은 ‘확장 기능’을 설치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파이어폭스 개발진 외에 제3자가 제작한 소프트웨어를 설치해 브라우저에 새로운 기능을 추가할 수 있었죠. 예를 들면 오른쪽 버튼을 누른 채로 마우스를 왼쪽으로 움직이면 이전 페이지로 이동하는 것 같은 기능이요. 지금이야 다른 브라우저들도 유사한 시스템을 탑재하고 있지만 그때는 가히 혁신적이었습니다.


(파이어폭스로 접속한 파이어폭스 웹사이트)


확장 기능은 파이어폭스 공식 웹사이트에서 검색하고 내려받을 수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모든 설명이 영어로만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양한 확장 기능에 대한 설명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올리는 웹페이지를 운영했어요. 일부 확장 기능을 한국어화하기도 했고요. 거기에 더해서 확장 기능 개발법에 대한 안내서도 뜻이 맞는 분과 공동으로 번역했습니다.


재미있었냐고요? 글쎄요. 그리 재미있진 않았어요. 확장 기능 소개문도, 개발법 안내서도 문장이 단조롭고 딱딱해서 솔직히 말하자면 좀 지겨웠어요. 그래도 번역 활동을 꽤 오래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들이 잘한다, 잘한다 해줬거든요.


파이어폭스 이용자가 전체 인터넷 사용자 중에서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여러 사람이 제 노력을 응원하고 격려해줬습니다. 그래서 우쭐했죠. 내가 뭐나 된 것 같았어요. 그 우쭐함이 계속 번역하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다만 개발법 안내서는 중도에 포기했어요. 관심을 갖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했죠. 다시 말하면 남들이 우쭈쭈 안 해주니까 힘 빠져서 관둔 거예요.



우쭈쭈의 힘

여기서 혼자서 번역 공부를 할 때 중요한 게 뭔지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우쭈쭈, 고상하게 표현하면 사람들의 인정이예요. 누군가 내 번역을 보고 도움이 됐다고, 고맙다고, 수고했다고 말해주니까 탄력을 받아서 계속 번역을 할 수 있었죠.


그런 게 없으면 금방 포기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번역이란 게 익숙해지지 않으면 대단히 고단한 작업이거든요. 아무리 외국어를 잘하고 글을 잘 쓴다고 해도 그 두 가지 능력을 통합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숨 쉴 줄 알고 다리 움직일 줄 안다고 바로 수영을 잘할 수는 없는 것처럼요.


그래서 저는 번역을 공부하려면 ‘덕질’의 일환으로 번역을 하시길 권합니다. 그래야 힘들어도 동료 덕후들의 응원으로 버틸 수 있어요. 가령 게임을 좋아한다면 신작 게임 소식이나 리뷰 같은 것을 번역해서 게임 커뮤니티에 올리는 겁니다. 그러면 분명히 번역 고맙다는 댓글이 달릴 거예요. 얼마나 좋아요? 나는 번역 실력 뽐내고 사람들은 좋은 정보를 얻고 말이죠.


(내 번역을 찬양하라)


단, 이때 주의할 부분이 있습니다. 저작권 문제입니다. 엄밀히 말해 남의 글을 무단으로 번역해 올리는 것은 저작권 위반이예요. 물론 그것으로 영리 행위를 하지 않고 저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소송을 당할 확률은 낮지만 도의적으로 영 찜찜하죠. 기왕이면 저자나 사이트 운영자에게 연락해 번역에 대한 허가를 받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혼자서 번역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기본기가 길러집니다. 그런데 한계도 분명히 있어요. 번역에 대한 평가를 받을 수 없다는 거죠. 인터넷 커뮤니티에 번역물을 올리더라도 굳이 어디가 틀렸다, 어디를 어떻게 고치면 더 좋겠다, 라고 지적해주는 사람은 드물어요. 그런 걸 알면 분명히 번역 실력이 향상될 텐데 말이죠.



스터디와 번역 수업

그래서 저는 함께 하는 번역 공부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냐고요? 스터디에 들어가거나 번역 수업을 듣는 거죠. 그러면 매주 과제 때문에 억지로라도 번역을 해야 하고 번역에 대한 비평을 받을 수 있으니 번역 실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스터디와 수업 중에서 좋기는 수업이 좋습니다. 수업을 진행하는 현직 번역가에게 첨삭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똑같이 공부하는 입장에 있는 지망생들이 지적하는 것과 실전 경험이 많은 번역가가 지적하는 것에는 질적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노하우를 전수받거나 출판계 사정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고요. 또 번역 실력이 출중하다면 실제로 출판사와 계약을 맺을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첨삭은 역시 빨간펜으로)


다만 번역 수업의 단점은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는 겁니다. 지방에서 수업을 들으려면 오가는 시간까지 포함해 최소 한나절은 써야 해요. 사실상 주말 수업 외에는 듣기가 어렵죠.


하지만 본격적으로 번역을 공부하겠다면 바쁘고 멀더라도 시간을 내서 수업을 듣기를 권합니다. 이때 수업을 듣는 시점은 한번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줄 수 있는 게 아무리 많아도 본인이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면 소용이 없으니까요. 번역의 기본기가 잡혀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선생님이 이건 이렇다, 이건 이렇게 하는 게 좋다, 라고 설명해줘도 이해하지 못하고 응용하지 못하거든요. 아직 물에 뜨지도 못하는데 국가 대표 수영 선수가 와서 접영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라고 시범을 보여줘봤자 오, 잘하네, 라고 감탄만 할 뿐 내 것이 되진 않겠지요?


그러니까 일단은 혼자 번역을 하거나 스터디를 하면서 나름대로 기초를 다진 후에 수업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게 좋습니다. 최소한 번역이 무엇인지 맛이라도 보고 수업을 들어야 해요.


제 경우에는 2007년에 바른번역에서 운영하는 글밥 아카데미에서 입문반과 전문반 수업을 들었습니다(현재는 입문반, 심화반, 실전반으로 운영됩니다). 말했다시피 2000년대 초반부터 혼자서 번역을 하면서 기본기를 다졌기 때문에 현직 번역가인 선생님들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제 자랑이긴 하지만 번역 일을 시작해도 괜찮겠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간신히 번역계의 문턱을 넘을 만한 능력은 됐다는 거죠.


그래서 2008년 1월에 선생님의 추천으로 바른번역에서 첫 일감을 받았습니다. 그게 첫 역서인 ⟪더 리치: 부자의 탄생⟫(공역)입니다.




자, 정리해볼게요. 번역 공부는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1. 관심 분야의 글을 번역하며 기본기를 키운다.

2. 번역문을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려 동력을 확보한다.

3. 기본기가 잡혔으면 수업을 듣는다.


이것으로 저를 번역가로 만든 세 가지 습관을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꾸준히 읽고, 쓰고, 번역하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 뻔한 습관이죠. 간단한 습관이고요. 그런데 유지하기는 사실 쉽지 않습니다. 이 세 가지를 병행하려면 하루에 최소 1시간은 내야 하는데 바쁜 일상에서 그런 여유 시간을 내기가 웬만한 의지력으로 되는 일인가요.


더욱이 그렇게 읽고 쓰고 번역한다고 해도 번역가가 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그나마 있는 의지마저도 꺾이기 십상입니다. 번역계에 들어오는 문은 길게 깔린 울타리 어딘가에 난 개구멍과 같아요. 찾기도 어렵고 통과하기도 어렵다는 말이죠.



번역 수업을 권하는 이유

출판번역계에는 공채 시스템이 없습니다. 번역가 지망생들이 가장 난감해하는 문제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번역 일감을 얻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거죠. 어디서도 공개적으로 번역가를 뽑는다고 지원을 받지 않으니까요. 제가 번역 수업을 듣는 것을 권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이나 수업을 운영하는 에이전시를 통해 출판계와 실낱 같은 연줄이나마 생기거든요. 아무리 부실한 줄이라고 해도 있고 없고는 천지차이입니다.


물론 수업을 듣는다고 다 번역가가 되진 않아요. 저와 같이 수업을 들은 분 중에도 실제 번역가로 활동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모든 수강생에게 번역 일감을 줄 수 있을 만큼 출판계에서 신인 번역가를 많이 찾는 게 아니니까 같이 수업을 듣는 사람들끼리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해야 하고, 또 이미 수업을 다 듣고 일감을 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수료생들도 있으니 그들과도 경쟁해야 하죠.



행운의 여신은 머머리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 개구멍을 찾아서 비집고 들어가는 건 솔직히 운칠기삼입니다. 실력을 기르는 건 기본이고 운이 따라야 해요.


저는 운이 좋았어요. 시간 많던 대학생과 공익 시절에 혼자서 번역하면서 기초 실력을 쌓은 후 글밥 아카데미가 처음 생겼을 때 수업을 들었거든요. 첫 수료생이어서 경쟁자가 별로 없으니까 쉽게 일을 받을 수 있었죠.


그래서 제가 이렇게 하면 번역가가 될 수 있다, 라고 말씀드리는 건 주제 넘은 짓입니다. 다만 이런 말씀은 드릴 수 있어요. 대학원 시절에 교수님에게 들은 이야기인데요, 공교롭게도 첫 번째 습관의 첫 문장을 장식한 명언, “너희 중에는 나중에 영문과 나왔다는 게 부끄러울 사람도 있을 거야”라고 했던 그 교수님입니다.


“행운의 여신은 뒤통수가 대머리야. 그래서 나한테 달려올 때는 확 잡아챌 수 있지만 이미 지나가고 난 후에는 잡고 싶어도 잡을 머리칼이 없지.”


행운의 여신이 언제 달려올지 모르니 그 전에 실력을 다지며 준비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기왕이면 지금부터 준비해서 행운의 여신이 코빼기라도 비추면 인정사정 없이 붙들고 번역가 시켜줄 때까지 절대 놓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기르시길 바랍니다.


(행운의 여신에게 코브라 트위스트를 걸고 있는 번역가 지망생)


번역 수업은 되도록 현직 번역가가 수강생의 번역 과제를 첨삭해주는 수업을 선택하세요. 빨간 줄이 죽죽 그어진 첨삭지만큼 번역 실력을 키워주는 게 없습니다. 정기적으로 번역 수업을 진행하는 곳은 다음과 같습니다.

글밥아카데미
한겨레교육
KT&G 상상마당 아카데미

간혹 번역가가 되기 위해 번역대학원에 진학하면 어떻냐고 묻는 분도 계신데 번역대학원은 가성비가 떨어져요. 한 학기에 등록금 500만 원씩, 2년 동안 2,000만 원은 내고 다녀야 하는데 그런다고 번역가가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번역 공부를 심도 있게 하고 싶다면 모르겠지만 단순히 번역가가 되기 위한 방편으로 대학원에 가는 것은 권하지 않습니다.


*이 글을 좋은 습관 연구소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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