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굉장히 감성적인 편에 속했다. 어려서는 같은 노래를 몇 시간 동안이나 반복해서 들으며 하루 종일을 누워있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어떤 노래의 멜로디에 한 번 꽂히면 그 매혹적인 감정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했고, 한편으로는 한 기수의 동아리 활동을 마치거나 혹은 여행을 다녀오거나 하면 그 밀려오는 감정에 입각한 찰진 감상글이 나오고는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언젠가부터 뭔가에 설레거나 감동을 느끼는 자아를 많이 잃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가끔은 정 없는 사람처럼 비추어지기도 한다. 어떤 대상에 설렐 수 있다는 것은 삶의 목표나 목적이 되고는 하는데 그런 면에서 무뎌진 나는 때때로 어떤 삶의 가치를 쫓으며 살아가야 할지 막연해질 때가 있다. 그런 때는 쫓을 감성이 없으니 논리성에 집착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뎌짐이 꼭 나쁜 면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설렐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실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무뎌짐은 감성을 앗아가지만 당황이라던지 분노라던지 하는 어떤 기대에 대한 반작용으로부터는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는 수고로움도 덜 수 있다. 그건 인생을 버팀에 있어서 분명 괜찮은 삶의 기능이다. 허지웅의 말마따나 냉소는 세상을 버텨내는데 퍽 유용한 태도인 것이다. 대단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우울할 필요도 없다는 처연한 감정으로부터 세상을 한 걸음 한 걸음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일관성이 나타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나라고 할지라도 가슴이 뭉클해지거나 눈물이 맺히거나 차오르는 감정이 목에 탁하고 걸리는 순간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건 바로 일생을 한 분야에 바친 사람들이 그 위대한 자리에서 퇴장하는 순간을 지켜볼 때다. 차두리가 국가대표 은퇴경기를 치른 후 하프타임 때 아버지이자 위대한 축구선수인 차범근 위원의 품에 안겨 하염없이 울던 모습을 볼 때가 그랬고, KBO 리그에서 단 한 시즌만을 선수로 생활한 박찬호 선수가 올스타전에 마련된 은퇴식에서 모든 프로야구팀의 주장과 감독들의 축복 아래 야구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을 지켜볼 때 그랬다. 그리고 근래에 하나 더 생겼다. 어벤저스 엔드게임을 통해 10년의 히어로 생활을 죽음으로 마무리한 토니 스타크의 마지막을 지켜볼 때다. 하마터면 울음이 터질 뻔했다. 아마도 그런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순간의 외로움을 견뎌냈는지, 그 순간을 넘어서기 위해 얼마나 처연해야 했는지가 무의식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 아닐까? 그 장대한 세월을 버텨낸 것에 대한 경의가 나도 모르게 내 무의식의 무엇인가를 건드려 메마른 나로 하여금 잊었던 감정을 다시 느끼게 만드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그런 위대한 인물들의 존재에 감사의 마음이 싹트는 것 같다.
이미지 출처 : https://pixabay.com/ko/photos/%EB%8F%84%EB%B0%95-gewinnspiel-41784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