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마치고 병원에 들려 침을 맞고 집에 돌아오니 밥솥에는 밥이 반공기 정도 남아있었다. 계란이 들어간 북엇국은 한 그릇 정도 될 것 같은 느낌이었고 찬장에는 저번 주 즈음 가족끼리 끓여먹은 부대찌개의 파편인 라면사리가 한 봉지 놓여있었다. '파편'이라는 말은 '먹고 남은 음식'을 뜻하는 우리 사무실 상임이사님만의 언어다.
냉장고를 열어보았더니 중간 크기 정도의 플라스틱 볼에 쌀 두 그릇 정도가 물에 담가져 있었다. 하지만 나 하나 먹자고 밥을 새로 하기가 왠지 귀찮게 느껴졌다. 어떻게 끼니를 때울까 궁리를 하면서 김치 냉장고까지 열어보니 호박, 당근, 파 등 아주 기초적인 야채들이 보였다. 일반 냉장고에는 상추도 소량 있었는데 대충 구색을 맞춰보니 찬장의 면 사리와 결합하면 비빔면 정도가 만들어질 각이 보였다. 기간이 꽤 된듯한 굴 소스가 냉장고 문쪽에 보여 이걸로도 뭘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지만 딱히 가진 재주로는 만들 수 있는 게 없어 보였다.
그렇게 초장이나 비빔장, 그도 아니면 고추장을 활용해 양념장을 만들어 비빔면을 만들어볼까 생각하던 와중에 냉장고에서 의외의 남은 음식을 발견했다. 얼마 전에 만들어 먹었던 자장이었다. 간자장 비슷하게 흉내 낸 자장이었는데 난 또 그걸 다 먹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가 싶었었는데 글라스락 그릇에 고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양을 보니 대충 한 그릇 정도 돼 보여서 순간 '이거네'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자장면이 만들어질 수 있는 조합이었다.
냉큼 깊이가 꽤 있는 웍을 하나 꺼내서 기름을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뿌렸다. 양을 생각해보면 뿌렸다는 표현보다는 부었다는 표현에 더 가까울 정도였다. 기름이 달궈지는 동안 북어국을 덥히고 북어국이 끓은 다음에는 다른 냄비에 물을 받아 라면사리를 끓였다. 그렇게 동시에 면을 끓이고 자장을 볶기 시작했는데 웍을 너무 많이 달군 나머지 자장이 투하되는 순간 기름과 자장이 큰 파열음을 내면서 가스레인지 밖으로 다 튀어져 나갈 법한 요란을 피웠다. 다행히 국자로 자장을 몇 번 저어주자 요동은 잠잠해졌다. 스테인리스 집게로 사리면을 몇 번 휘휘 저어주면서 면을 다 익히고 난 후에는 채에 담아 찬물로 박박 씻어주었다. 냉장고에서는 마침 또 삶은 계란이 하나 발견되어 마지막에 얹어질 고명까지 그림이 그려졌다. 냉장고에 있었는지가 꽤 오래된 것 같이 보였지만 껍질을 까서 반을 자르니 그런대로 먹을만한 것처럼 보였다. 준비된 재료를 그릇에 면, 자장, 계란 순으로 담아 놓으니 대충 모양은 나오는 자장면이 완성되었다. 다만 맛이 그리 훌륭하지는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한 사람이 먹은 것 치고는 너무 과한 설거지거리들이 싱크대를 다 차지하고 있었다.
점심을 직접 해 먹는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나는 목요일이 당번인데 요새는 장 보러 나가기가 귀찮아 최소한의 필요한 식재료만 구매해서 점심을 준비하고 있다. 대신 냉장고에 남은 식재료가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고 그것들로 무엇을 해 먹을 수 있을지 궁리를 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새로운 음식을 시도해볼까?라는 질문에 대한 역발상 같은 답이었다. 막연하게 안 해본 음식이 뭘까 떠올리는 게 아니라 일단 확보할 수 있는 자원을 확인한 후 그것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음식은 무엇인가를 고찰해 보는 것이었다. 배추가 남아있으면 겉절이를 만들어 보고 가지가 보이면 가지볶음을 만들어보고 파가 남아있어 파전을 만들어 보았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들로부터 할 수 있는 메뉴의 바운더리를 확장시켜 나가며 음식 준비에 대한 자유도를 점차 늘려나가는 게 이 행동양식의 요점이다. 당번 중 한 명 정도는 냉장고에 관심을 가져야 썩어 버려지는 식재료가 생기지 않는다는 작은 덕목도 하나 챙기면서 말이다.
예전에 읽었던 기사가 하나 떠오른다. 창의성이란 언제 발현되는가? 에 관한 주제의 글이었다. 글은 하나의 사례를 인용하면서 답변을 해 나갔는데 이를테면 배가 침몰하고 있다고 가정할 때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서 막연하게 무한한 자유를 제공하고 제약을 모두 없애버리는 것보다 하나의 제약이나 조건을 주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 창의적인 답변을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30분 안에', 혹은 '한 시간 안에'라는 조건이 발생할 때 사람들이 해결방안을 더 잘 내놓는다는 것이다. 너무 오래전에 읽었던 것이라 구체적인 내용은 가물가물하다. 실은 그 단서가 '30분', '한 시간' 등 시간적인 것이었는지도 좀 희미하긴 하지만 여하간 그런 뉘앙스의 맥락이었다. 결국 골자는 창의성이란 '내게 주어진 자원은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명저 '총. 균. 쇠'를 보면 너무도 유명하고 당연시되는 속담을 저자가 반박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것은 필요가 발명을 낳는 것이 아니라 발명이 필요를 낳는다는 주장이었다. 작가는 그 근거로서 에디슨의 축음기를 예로든다. 에디슨은 축음기를 노래를 트는 용도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대신 그는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용도로 축음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축음기가 대중화된 것은 그것이 발명된 뒤로 '음악의 재생'이라는 또 다른 목적을 부여한 당시 사회에의 기업집단에 의해서였다. 말하자면 어떤 발견이 잠재되어 있던 필요를 깨우치게 만든다는 것이다. 내 주변에 무엇이 있나 잘 살펴보고 살아야 할 이유를 제시하는 부분이었다.
창의성은 언제나 재조합과 재해석의 영역이다. 거창한 것을 꿈꿀수록 현실과 동떨어진 가능성이 높아진다. 냉장고를 뒤적거리며 만든 자장면의 맛이 그리 훌륭한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것은 확보된 자원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태도를 체화시키는 나만의 작은 습관 연습이라 정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