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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줌은 나와 만수르를 같게 한다.

by 글객

오줌을 누는 데는 참 이율배반적인 면이 있다. 터질듯한 방광을 부여잡고 길게 늘어진 화장실 줄에서 내 차례를 기다릴 때는 남들이 배뇨를 해내는 시간이 그렇게도 길게 느껴지다가 막상 내 차례가 되어 방뇨를 시작하는 시점부터는 시간이 급속도로 빠르게 흘러간다는 점이다. 영화관이라는 똑같은 공간에서 비슷한 양의 콜라를 마신 성인 남자의 평균 배뇨시간에는 그렇게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배뇨를 참는 자와 배뇨를 행하는 자가 느끼는 시간의 차이는 상당하다. 방뇨를 해내는 자와 그렇지 못하는 자에게는 상대성이론이라도 적용이 되는 것일까. 대기열에서의 인고의 시간 뒤에 찾아오는 방뇨가 허락되는 순간은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인류를 구한 우주비행사 조셉 쿠퍼를 떠올리게 한다.


"타스(극 중 인공지능 로봇), 내가 오줌을 싸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갔지?"

"참고 있던 오줌의 양이 상당해서 5분이나 시간이 빨리 갔습니다. 쿠퍼"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자신의 방광으로부터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오줌이라는 건 참으로 거추장스럽고 귀찮은 행위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방뇨를 위해 시간을 할애해야 하지 않는가. 오줌을 싸지 않아도 되는 과학기술을 발견하기 전까지 인류는 화장실이라는 누추한 공간에서 인생의 일부를 보내야만 한다. 아프리카에서 태동한 현생 인류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수많은 문명의 발전을 이뤄냈지만 결국은 똥 싸고 오줌 싸는 존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배설과 배뇨를 하는 순간만큼은 인간은 동물로부터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존재다. 문명의 허망함은 변기를 앞에 두고 바지를 내리는 순간 선명해진다.


몇 년 전 홍대 상상마당에서 시나리오 글쓰기를 배울 때 그런 단편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다. 어떤 남자의 꿈에 관한 이야기인데 꿈속 세상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더 이상 오줌을 사지 않아도 되는 시대다. 하지만 그 진일보적인 생명과학기술은 인류를 싸는 자와 싸지 않는 자로 구별하여 빈부, 혹은 권력자와 비 권력자의 구분 선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화장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권력자들은 도시에서 화장실을 추방시켜 버렸고 싸야만 하는 자들은 도시에서 얼마 남지 않은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하루에도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한다. 커져가는 빈부의 격차는 미래에 어떤 형태로 발현될지에 대한 상상 같은 이이기였고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하는 인류 최후의 보루는 무엇일까에 대한 오줌 냄새나는 잡념이었다. 지금도 이 브런치 어딘가에 게시되어 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시대 까지는 모든 인류가 오줌을 눈다. 오줌 싸는 순간만큼은 만수르나 나나 별반 다를 것 없는 누추한 존재다.


이미지 출처 : https://pixabay.com/ko/photos/%ED%99%94%EC%9E%A5%EC%8B%A4-%EA%B3%B5%EC%A4%91-%ED%99%94%EC%9E%A5%EC%8B%A4-1542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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