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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닝멘탈리티의 회복 1

by 글객

축구선수였던 이영표 선수는 은퇴할 무렵부터 해설위원으로 데뷔하는 기간 동안 이런저런 방송에 꽤 출연했었다. 그때 즈음 이영표 해설위원은 유럽 선수들의 멘탈에 관한 이야기를 방송에서 많이 했다. 우리가 흔히 운동선수들의 멘탈이라고 하면 '정신력'이라고 직역해서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정신력과 그들의 '멘탈'이라는 개념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 이야기의 핵심이었다. 이영표 해설위원이 말하는 멘탈이란 말하자면 '이기는 습관'이었다. 그건 우리가 이해하는 정신력의 속성인 투지, 헌신, 끈기, 열정 같은 것과는 조금 결이 다른 이야기였다.


투지, 헌신, 끈기, 열정. 듣기에는 좋은 단어들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그런 마음 상태가 승리를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승리와 관계없이 투지를 부릴 수 있다. 진다는 결과가 뻔한 경기에서 팀에 헌신하는 플레이를 할 수도 있다. 끈기와 열정도 마찬가지다. 팀이 이기고 지는 것과 관계없이도 그런 태도들은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경기장의 덕목들이다.


그렇다면 위닝 멘탈리티라는 건 무엇일까. 축구선수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축구로 이야기를 해보면 아마 그것은 '90분이라는 경기 시간 동안 단 한 차례도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를 이야기하지 않을까 싶다. 전후반의 경기 동안 발생하는 변수나 변화하는 경기 상황과 흐름에 상관없이 매 순간 이기는 가능성만을 생각하는 정신상태. 그것이 이영표 위원이 말하는 멘탈의 진정한 의미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월드컵 같은 큰 경기가 끝나고 나면 언론을 통해 볼 수 있는 '끝까지 잘 싸웠다.' 등의 헤드라인은 90분 중 어느 순간부터는 패배를 상정하고 있었다라는 것을 보기 좋게 포장한 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 세대의 청소년기를 점령한 문화 중 하나는 블리자드 사의 명작 스타크래프트였다. 나는 스타를 그리 잘하지 못했다. 아니, 잘 못하는 편이었다. 그것이 어린 시절의 주류문화였고 아주 절친한 친구의 영향으로 인해 참 많이도 했지만 손에서 놓을 때까지도 꽤 못하는 축에 속했다. 그런 실시간 시뮬레이션 게임에 친숙한 성향도 아니었거니와 많은 사람들이 플레이하는 게임인 만큼 점점 더 고수가 즐비한 문화로 자리매김해갔기 때문에 내 게임 실력은 거의 항상 하위권을 전전했었다. 물론 프로게이머들이 스타리그 같은 게임 대회에서 절정의 실력으로 플레이하는 것을 보는 것은 좋아했지만 내가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로 역할하는 것은 굉장히 다른 문제였다.


스타크래프트가 나라는 사람에게 직접 즐기는 문화에서 보는 게 즐거운 문화로 조금씩 변했던 원인은 게임을 하면 웬만하면 졌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지는 행위를 즐길 수 있는 인간은 지구 위에 얼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했다 하면 패배가 속출하는 행위를 별로 즐길 수 없었다. 반대로 어느 정도 승리를 챙길 수 있었던 2대2 혹은 3대3 팀플레이는 곧잘 즐기면서 했다. 가물가물하지만 팀플에서는 못해도 두 번에 한 번 정도는 승리를 챙겼었던 것 같다. 팀플에서는 전체 경기에서 내 몫이 1/2, 1/3이기 때문에 내 실력이 전체 게임에 영향을 미칠 확률이 더 낮았고, 팀플레이라는 특성상 개개인의 실력보다는 게임의 기본기와 팀워크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내 계정의 승수와 패수는 대부분 팀플레이로 이룬 성적의 결과물이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스타 1대1에서 계속해서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게임을 하면서 이기고 싶다거나 혹은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게임을 하다가 위기가 오거나 전세가 기우는 상황을 맞이하면 '어떻게 위기를 넘길 것인가' 혹은 '어떻게 역전을 시켜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에이 졌네'라는 생각을 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리고 그런 식의 경험이 쌓이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게임을 시작할 때 승리를 상정하지 못했던 것 같다.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그런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본질은 상대를 이기는 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위닝 멘탈리티가 없었던 것이다. 나에게 스타란 몇십 분간 열심히 키보드와 마우스를 두드리고 나면 상대방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그나마라도 나은 결과는 지면서도 상대의 확장 기지를 파괴하거나 일정 부분 상대에게 타격을 가하는 상황을 연출시킨 것 정도에 불과했다. 말 그대로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가 한계였던 것이다.


게임에 불과한 이야기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나라는 사람과 내 인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던 대목이지 않나 생각이 든다. 지난날들을 되새겨 보면 나는 이기는 습관보다 지는 습관이 나를 지배하게 두었던 시절이 더 많았다. 이건 누군가를 이겨먹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문제 상황이나 역경을 헤쳐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들이 힘겨운 것 또 한 근본적으로는 사람에서 오는 것이 많지만 어쨌든 어떤 장벽을 만났을 때 그것을 넘어서 버릇하는 습관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은 것이다. 이겨낸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니 중간중간 만나는 장애물들을 딛고 나아가야 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결과가 돼버리는 경우가 많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물론 내 인생 모두가 그런 애처로운 내면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만은 아니다.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할 때라던지, 재수 생활을 할 때는 굉장히 탄탄한 내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인생에서 꽤 성공적인 결실을 맺은 시기가 그런 시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시절의 내 내면은 위닝 멘탈리티가 가득 차 있었다기보다는 순수하게 그 시기를 즐긴 것에 가까웠다고 표현되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위닝 멘탈리티보다 더 강도 높은 정신상태 일지도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그런 안정된 내면의 태도를 꾸준히 유지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런 시절들은 내 인생에서 어떤 특이점처럼 느껴진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시절들의 내가 지금의 나로서는 뭔가 회복시키고 싶은 존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어떻게 나 자신을 회복하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을까.


to be continued


이미지 출처 : https://pixabay.com/photos/achieve-woman-girl-jumping-running-182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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