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사투리의 할머니가 깨 부신 작은 마음의 벽

[ 제주는 언제나 나를 품는다_episode_9 ]

by 글객
7/29(수) - DAY 3_1


#24


시간은 대략 오전 11시, 날씨는 전날처럼 여전히 습했고 햇살은 뜨거웠다. 선크림을 전날보다 꼼꼼하게 발랐지만 목덜미는 여전히 뜨거웠다. 자전거를 탈 때 바람으로부터 안면을 보호해주는 버프라도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날씨. 날씨가 덥다고 해서 무조건 옷차림을 가볍게 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는 날씨였다. 부산 태종대 갯바위에서 스카프로 얼굴과 머리를 꽁꽁 싸맨 체 일하는 할머니들의 삶의 지혜를 갈망하며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종일 걸어 다녔던 전 날과 달리 셋째 날은 조금 활동적인 여행을 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지도 어플을 켜놓고 숙소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범위 내에서 즐길거리를 찾아보았지만 여의치가 않아 보였다. 그러다 여행정보를 알려주는 한 어플을 다운로드하게 되었는데 제주 관광지를 지역별, 카테고리별로 구분하여 알려주는 어플이었다. 액티비티, 가이드 투어, 이색 체험 등 카테고리 별 여행지를 제주 동쪽, 서쪽, 남쪽 등의 지역으로 구분하여 알려주니 원하는 정보를 얻기가 편했다. 그중 액티비티 카테고리에서는 한림읍 소재의 한 테마파크인 더마파크에 대한 정보도 제공하고 있었는데 승마체험, 전문 기마단 공연 등 말과 관련된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었고 부가적으로 카트도 탈 수 있는 곳이었다.


더마파크에 가기 위해서는 785번 버스를 타야 했다. 버스가 서는 정류장이 숙소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는 땡볕에서 20여분을 걸은 뒤였다. 정류장에 도착한 후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벽면의 버스시간표를 확인해보니 785번 버스는 대략 20분 안에 도착할 것으로 보였다.


처음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책을 볼까 했다. 하지만 이내 스마트폰을 켜고 유튜브에 업로드되어 있는, 드라마 편의점샛별이의 클립 영상들을 보기 시작했다. 전 날 밤을 지새우며 시청하느라 나의 아침 시간을 상당 수준 빼앗아 버린 바로 그 드라마. 언젠가 이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본 적이 있었는데, 김유정을 비롯한 20대 초반의 여자 친구들이 흡사 본 시리즈의 맷 데이먼과 같은 선 굵은 격투 액션을 선보이는 것이 인상 깊어 시간이 되면 1화부터 챙겨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마침 숙소 IPTV에서 초반 화들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어서 몇 화만 본다는 것이 6화까지 정주행을 해버렸고 그래서 늦은 아침까지 일어나지를 못해 11시가 다 돼서야 숙소를 나왔던 것이다.


그렇게 허리를 조금 아래로 구부린 자세로 정류장 벤치에 앉아 블루투스 이어폰을 낀 채 영상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 시야 좌측 편에 있는 횡단보도에서부터 허리가 굽은 할머니 한 분이 정류장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허리가 굽은 정도가 내 자세의 두 배 즘은 되어 보이는 할머니는 조금씩 내 쪽으로 걸어오더니 정류장 2미터 정도 옆에 멈춰 서선 땅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왜 굳이 땅바닥에 앉으실까 생각을 하려던 찰나, 뭐라 뭐라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이어폰을 뚫고 들려왔다. 벤치에 앉아있던 나는 계속해서 블루투수 이어폰을 낀 채 유튜브로 영상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가 내는 소리 자체는 들을 수 있었지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까지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25


이어폰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아마도 할머니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조금 부끄럽지만 나는 그런 의중을 전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말하는 게 아니겠거니'하는 생각으로 할머니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한적한 시골 어딘가의 정류장이라 주변에 다른 사람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들었던 '누구에게도 간섭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보이지 않는 단절의 벽을 만들어 나로 하여금 할머니의 행동을 무시하게끔 만들어버린 듯하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렇게 몇 분 간 똑같이 유튜브를 보던 나에게 다시 한번 무슨 말씀을 건넸다. 커널형 이어폰을 기어코 뚫고 들어오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다시 한번 외면하기는 어려워 나는 귀에 꼽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내가 뱉은 "네?"라는 아주 짤막하고도 군더더기 없는 답변을 들은 할머니는 제주도 사투리가 꽉 차게 버무려진 구수한 억양으로 지금이 몇 시냐는 질문을 다시 던졌다.


" 지금 멧 시고? "

" 11시 38분이요. "

" 한림체육관 가는 버스가 몇 시에 오는가? "

" 무슨 체육관이요? "

" 한림체육관~ "


편한 옷차림에 그리 여행용처럼 보이지 않는 배낭을 메고 있었기 때문일까. 나를 현지인으로 생각했던 것인지 할머니는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한림체육관에 가는 버스가 몇 시에 오는지를 나에게 물었다. 그 질문은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일단은 지도 어플을 켜서 한림체육관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또 지금 위치에서 거기까지 가려면 어떤 버스를 타야 하는지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확인을 해보니 체육관은 정류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고 내가 타야 하는 버스인 785번을 비롯하여 비슷한 700번대 버스들이 그곳까지 당도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버스를 타야 하는 위치가 지금 정류장이 아닌 할머니가 건너온 횡단보도 쪽, 말하자면 반대편의 정류장이라는 사실이었다.


지도 어플 상으로는 횡단보도를 건넌 후 몇십 미터를 더 전진하면 그 정류장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할머니와 내가 있는 쪽에서는 육안으로 그것이 확인되지 않았다. 길가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어르신에게 혹여 잘못된 정보를 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직접 횡단보도를 건너 어플상으로 보이는 지점으로 이동하니 다행히도 정류장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정류장과는 달리 그곳에는 부스나 벤치는 없었고 땅에서부터 우뚝 솟은 머리가 둥근 표지판 하나가 '이곳도 버스가 서는 곳이오'라고 은근히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정류장을 육안으로 확인한 나는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 할머니가 바닥에 철퍼덕 앉아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뚜렷하게 응시하는 특정한 지점이 없이 몇 초씩의 간격으로 도로 이쪽 저쪽을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걸어가던 나는 할머니 옆에 멈춰서 쪼그리고 앉아 지금까지 판단한 사실을 전달하려 했다. 할머니는 도로 쪽을 응시하는 상태로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 할머니, 버스를 저쪽에서 타셔야 되는 것 같은데 ~ "

" 아니여 여기 맞아 "

" 여기 맞아요? "

" 응 여기 맞어 "

" 평소에도 여기서 타세요? "

" 응 요기서 타~ "


하지만 할머니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매번 버스를 타는 현지분이 정류장 위치도 모른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처럼 느껴졌다. 이에 다시 한번 지도 어플을 확인해보니 최초에 확인했던 700번대 버스들과는 다르게 200번대의 버스들이 할머니와 내가 있는 바로 그 정류장에 정차하여 한림체육관까지 이동한 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도 어플이라는 게 특정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최적의 방법을 우선적으로 알려주기 때문에 정 반대의 방향으로 한림체육관에 가는 버스까지는 미쳐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할머니의 최초의 물음은 버스가 언제 오느냐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확인한 나는 바로 옆 정류장으로 돌아가 벽에 붙은 버스시간표를 다시 살폈다. 역시나 정확하게는 시간을 알 수가 없었지만 표를 보니 내가 탈 785번 버스처럼 할머니가 타야 할 200번대 버스도 머지않아 도착할 것으로 보였다. 이를 알리기 위해 다시 한번 할머니 옆으로 다가가 똑같이 쪼그려 앉은 자세로 버스가 곧 올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해드리자 정보수집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할머니는 나에게 이런저런 것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 할머니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곧 올 것 같아요 "

" 곧 온다고? "

" 네 "

" 혼자 여행 왔는가? "

" 네 혼자 왔어요. "

" 어디서 잤노? "

" 저기, 수원리 쪽에서 잤어요(정확히는 바로 옆 용운동이지만) "

" (시간이 열 두시를 향해가서 인 듯)에고, 밥도 못 먹었겠네 "

" 아침을 좀 늦게 먹었어요. "

" 밥 꼭 챙겨 먹으래이 "


처음 보는 청년이 손주처럼 보여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어디서 자는지 밥은 잘 챙겨 먹는지 걱정을 해주는 할머니의 말씀은 그분의 말을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나 자신을 조금 부끄럽게 만들었다. 대화의 주제가 용건을 묻는 논리적 이야기에서 안위를 묻는 감성적 이야기로 전환되는 순간 언제부턴가 닫혀있던 마음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몇 번의 대화를 나누다 이어갈 말이 없어진 나는 "저는 저기 의자에 앉아있을게요."라는 말과 함께 정류장으로 돌아와 벤치에 앉았는데 당신도 의자에 앉으시라는 권유에도 할머니는 여기가 그늘이라 시원하다며 계속해서 그 위치에 엉덩이를 깔고 버스가 올 때까지 앉아계셨다.


몇 분 후, 내가 횡단보도를 잠시 건너갔던 쪽과는 다른 방향으로부터 초록색 버스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버스는 할머니와 내가 각자 앉아있던 정류장 앞에 사뿐히 정차하였고 바닥에 앉아있던 할머니는 몸을 일으켜 버스의 입구로 향했다. 할머니는 버스 기사를 향해 다시 한번 한림체육관에 가느냐고 물었다. 그러고 난 뒤 천천히 입구의 계단을 오르며 버스에 탑승했다. 그런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할머니를 향해 조금 경쾌한 말투로 "들어가세요."라는 마지막 인사말을 건넸다.


# 26


일상에 지쳐서 여행을 떠났다고는 했지만 사실 그 일상이란 아마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럴듯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남들에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드세우려다 마치 깊은 물에 잘못 들어간 것처럼 숨을 헐떡인 꼴이라고나 할까. 돌이켜보면 자발적 압박감인 감도 없지 않지만 어쨌든 그렇게 시나브로 쌓인 어떤 정서적인 벽이 조금씩 나에게로 엄습해오는 것에 작은 한계를 느껴 그 순간에 어딘가로 떠나는 것을 최대의 당위로 여겼던 것 같다. 그런 이유로 홀로 제주에 왔고 그런 연유로 홀로 제주를 거닐고 있었다.


하지만 짙은 사투리로 예고편 없이 들어온 할머니의 언어는 조금씩 스러지기를 바랐던 나의 정서적인 벽에 단숨에 균열을 일으켰고 그대로 내 안으로 파고들어와 작은 따뜻함이 되었다. 한국적 정서와 신파를 그리 좋아하지 않은 나 자신이면서도 할머니가 말을 걸어온 정류장에서의 그 상황은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지고 있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머릿속 한 켠에는 '뭐 별다를 게 있기는 할까?' 하는 작은 의심의 씨앗을 가지고 있던 나였지만 그 장면은 부활의 리더 김태원 선생이 한 참 예능 방송에 나오던 시절 언뜻 던졌던 한 마디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만들기 충분한 장면이었다.


" 돌부리에 넘어지더라도 어떤 사건을 겪고 싶다면 집 밖으로 나가라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무슨 일이고 일어나는 것이 여행이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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