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이유

[ 제주는 언제나 나를 품는다_episode_16 ]

by 글객


7/30(목) - DAY 4_1


#43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안나 카레니나에는 남자 주인공 블론스키에게 청혼을 거절당한 키티가 마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온천 여행을 가는 대목이 나온다. 키티는 처음에는 온천 여행에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지만 거기서 바렌카라는 소녀를 만나며 조금씩 마음의 병을 치유해 나간다. 순수한 영혼인 바렌카와 보내는 시간에서 어떤 삶의 위안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음의 병 때문에 치료의 여행을 떠난다는 대목. 이 소설을 처음 읽었던 4년 전 즈음에는 그 대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었다. 마음의 병을 고친다는 명목으로 키티와 그의 가족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온천여행을 가게 된다는 이 인과는 내가 가슴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책을 처음 읽었던 것도 4년 전 제주 여행이었는데,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또다시 홀로 제주에 와있다. 4년 전 그 여행 이후로 나는 주말마다 틈틈이 그 소설을 다 읽었는데 지금은 사람에 대한 상처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키티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4년 전 나는 인생의 갈피가 집히지 않는 공허함으로 홀로 제주를 찾았다. 반면에 지금의 나는 일상으로 인해 지친 심신을 달래러 제주에 와있다. 그때는 마치 노래 가시나무의 가사처럼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았고, 지금은 정반대로 내 안에 다른 누군가가 너무도 많다. 내 마음의 방들을 너무도 많은 이들에게 내어주고 정작 나 자신을 위해서는 다락방 하나 만을 허락해 둔 듯한 쓸쓸함. 왜 누구도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에게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일까.


살면서 가장 힘든 순간들은 아무 생각이 없어진 나 자신을 마주할 때다. 텅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들이 가득 차서 어떤 생각도 머릿속을 스치지 않고 있다고 느껴질 때면 마치 자아가 없는 기계가 돼버린 기분이 든다. 어디로 향하는지, 뭘 위해 사는지, 생활의 밑천이었던 나만의 신념과 표방할 만한 좋은 태도들을 언제 잊어버렸는지도 알 수가 없는 그런 상태. 그럴 때면 내 과거는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했는가 의문이 든다.


제주라는 섬은 그런 상처 입은 나를 품는다. 수많은 관계에서 벗어나 지천에 깔려있는 초록과 바다와 햇살을 품으며 터벅터벅 걸으면 온전한 나 자신을 만나는 그 어느 순간이 찾아온다. 다시 생각이 흐르는 게 느껴지고 생각이 낳는 또 다른 생각에 집중해보는 충만함을 느끼면 내 영혼이 아직 살아있음에 안도감이 든다. 그것이 아마 내가 때때로 제주를 찾게 되는 이유인 것 같다. 어떻게든 떠나야 과거에 떠났던 이유를 다시 찾을 수가 있다.


여행의 네 번째 날 아침이 밝았다. 체크 아웃을 위해 벌써 익숙해진 숙소를 정리하고 여기저기 펼쳐두었던 물건들을 주섬 주섬 모아다가 다시 가방을 쌌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침대에 앉아 음악을 듣는데 들어도 가슴 깊이 남지 않았던 더 콰이엇의 노래 멀리우원재의 가사가 그 순간만큼은 완전하게 들리고 있었다.

그냥 떠나고파 멀리
이건 거리를 말한 건 아니지
안정 그게 내 목적 say

- The Quiett, '멀리' 中 (Feat. Hash Swan & 우원재 )




[제주는 언제나 나를 품는다] 전반기를 마칩니다.


안녕하세요 GLO입니다. 최근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기적으로 여행기를 올릴 예정이었으나 집을 알아보고 이사를 하는 과정에 생각보다 개인 시간을 많이 쓰게 되네요. 특히나 별 다른 옵션이 없는 집으로 이사를 오다 보니 최소한의 생활에 필요한 주변을 마련하는 데 어쩔 수 없이 많은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이번 전반기를 계기로 업로드를 잠시 쉬고 꾸준히 에피소드를 올릴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를 되찾은 후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계속해서 관심 보여주신 이웃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이미 올린 여행기 중 월요일 ~ 수요일의 날짜가 하나씩 뒤로 밀려 금번에 수정을 했습니다.


20200730_084646.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완벽한 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