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는 언제나 나를 품는다_episode_24 ]
7/30(목) - DAY 4_9
#59
" 스위스마을입니다. 오후 3시 입실 가능하십니다. 몇 시쯤 입실 예정이신가요? "
" 그쯤 될 것 같습니다. 혹시 세탁할 수 있는 시설이 있나요? "
" 객실에는 세탁기가 없고 마을 안에 빨래방이 있어요. 113동 1층이 빨래방입니다. "
오전 10시 22분, 봄날 카페에서 책을 읽을 때 즈음 두 번째 숙소의 주인과 주고받은 문자 내용이다. 더 이상 빨래를 미룰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해 세탁 시설의 여부를 묻는 나에게 주인은 사진까지 보내주며 친절한 설명을 해주었다. 숙소는 스위스마을이었다. 건물이 여러 동으로 나뉘어 있어 마을 안에 숙소와 편의시설, 카페, 음식점 등이 집합해 있는 마을 아닌 마을이었다. 주인은 간단한 빨래라면 욕실에서 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왔지만 손빨래로 해결하기에는 쌓인 빨래의 양이 적지 않았다.
마을은 말하자면 산골에 위치해 있었다. 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 입구에서 마을을 보면 경사면을 따라 차례로 세워져 있는 건물의 꼭대기들이 바닥의 경사도만큼 사선을 그리며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는 먹구름이 들어찬 우중충한 하늘이 스산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60
어디에 위치한 스피커로부터 인지 모르겠지만 잔잔한 음악만이 흐르고 있는 마을의 고요함을 스쿠터 굉음으로 깨어버리며 목적지인 스위스마을에 입장했다. 중간중간 끊어 오기는 했지만 장시간의 이동으로 인해 피로감이 쌓여있었다. 숙소에 들어가 짐을 풀고 샤워를 하거나 잠시 누워 쉬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차 있었다. 2박 3일 동안 지낼 숙소의 위치는 206동 201호였다.
" 7월 30일 206동 201호 2박 예약되셨습니다. 현관은 셀프체크인입니다. 처음 나오는 숫자 2개를 누르시고 비번 OOOO을 누르시면 됩니다. 방은 ####입니다. "
주인과 주고받은 문자에는 숙소에 들어가는 방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 나오는 '숫자 2개'를 누르라는 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건물의 사진까지 찍어 보내주는 센스와 친절함을 보여주는 호스트였다. 입구를 지나 마을의 안쪽까지 들어와, 마치 사치라도 부리듯 일반 차량용 주차 구획 한 자리를 혼자서 차지하며 스쿠터를 세운 나는 시트 아래에 넣어 두었던 짐을 꺼내 206동으로 향했다.
건물들은 보통 1층은 가게, 2층부터는 숙소로 설계되어있었다. 그래서 길 정면에서 보이는 것은 여러 종류의 상점이었고 2층으로 올라가는 입구는 보통 측면에 위치해 있었다. 처음에는 그 측면에 위치한 건물의 현관 앞에 도달하면 주인이 말한 '숫자 2개'의 의미를 자연히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 다르게 도어록을 뚫어져라 쳐다봐도 그 '숫자 2개'가 어떤 조작을 말하는 지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급한 대로 패드 위 임의의 숫자 2개를 한 을 눌러보았지만 마치 무생물의 도어록이 '뭥미?'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그곳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61
뭔가가 잘못됐다. 그 자리에서는 뭔가 더 시도해볼 사항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상하다는 마음에 주인이 보내온 문자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여러 건의 설명과 여러 건의 사진들. 자세히 살펴보니 사진 속 건물에 216이라는 숫자가 붙어있는 것이 보였다. 알고 보니 예약한 방은 216동이었다. 이메일로 받은 예약정보를 다시 확인해보니 예약한 방은 216이라고 적혀있었다. 사진까지 보내준 친절한 호스트가 건물 동 번호를 잘못 알려준 것이다. 스위스마을이라는 이름으로 건물들이 같은 콘셉, 같은 형식, 비슷한 색감으로 디자인되어 있어 그 차이를 쉽게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216동은 206동 보다 조금 더 마을 입구 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게 다시 찾아간 216호의 현관에 가서야 주인이 말한 '숫자 2개'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기 위해 도어록의 숫자 패드를 활성화시키면 1차적으로 임의의 숫자 2개에만 불이 들어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두 개의 숫자를 터치하고 나면 전체 숫자에 불이 켜졌고 본격적으로 비밀번호 4자리를 입력할 수 있었다. 어떤 목적으로 사전 절차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드디어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현관문을 열면 방 번호가 부착된 신발장이 제일 먼저 보였고 그 안에는 갈아 신을 수 있는 슬리퍼가 있었다. 그 상태에서 몸을 오른편으로 돌리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고 그 초입에는 손 소독제 한 병이 덩그러니 놓여 들어오는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62
피곤함에 쌓인 나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짐을 풀었다. 그리고 첫 번째 숙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각자의 자리에 위치시켰다. 사이즈는 첫 번째 숙소에 비해 조금 작은 방이었지만 더 세련된 공간이었다. 콘센트가 더 많아 이용이 편리할 것 같았고 철재 옷장도 구비되어 있었고 흡수력이 괜찮아 보이는 수건들이 넉넉한 장수로 수납장에 놓여있었다. 모두 같은 디자인의 것으로 깔끔하고 깨끗해 보였다. 화장실은 조금 더 현대식이었고 샤워부스가 설치되어 있어 반가웠다.
쉬는 것도 쉬는 것이지만 급선무는 세탁에 있었다. 겉옷 종류는 더 입으라면 더 입을 수 있겠지만 속옷이나 받쳐 입는 면티들은 재고가 바닥난 상태였다. 첫 숙소 근처 편의점에서 가져왔던 검정 비닐봉지에 빨래들을 담아 다시 집 밖으로 나섰다. 주인이 말한 빨래방이 있는 113동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마을 안이니 처음에는 걸어갈까 생각을 했지만 피곤함으로 인해 스쿠터를 선택했다. 화석연료를 연소시켜 수직 왕복운동을 회전운동으로 바꾸는 기술 문명에 기댄 한 인간의 좌표 이동은 신체를 편하게 했지만 본의 아니게 발생시키는 소음이라는 부산물은 마을의 정적을 깨는 것 같아 작은 죄책감을 만들었다.
113동은 마을의 언덕 중간 즈음에 있었다. 그 덕에 스쿠터의 메인스탠드를 세우는 게 조금 버겁게 느껴졌다. 주차를 시키고 바라본 건물 1층의 빨래방은 내부가 어둡게 보였다. 그 어둠 속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공간 안에는 도시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빨래방의 그 모습 그대로 대형 및 중형 세탁기와 건조대가 들어차 있었다. 수평으로 열리는 동그랗고 커다란 문이 달린, 그리고 그 문 오른편에는 조작법과 돈을 넣을 수 있는 장치가 부착되어 있는 그 세탁기 말이다. 하지만 여행 4일 차를 보내고 있는 여행객이 세탁기를 이용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부엉이 인형을 살 때 1만 5천 원을 써버려 수중에 남아있는 현금이 세탁기 이용료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빨래방은 카드결제를 제공하고 있지 않았다. 현금 장사를 기본으로 하는 무인의 점포 안에서 인류를 빨래라는 노동에서 해방시킨 기술 문명은 무용지물이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