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노동량을 현격하게 줄이고 그 어떤 기술이나 사회적 혁명보다도 여성의 사회진출에 더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인류의 발명품, 세탁기를 사용하겠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혹시 몰라 지도 어플리케이션으로 주변에 ATM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이 있는지 확인해 봤지만 근처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내 주거래 은행은 애초에 제주도 내에 지점이 몇 개 없었고 그 보다 규모가 큰 은행도 제주도 내 지점이 몇 개 없었다. 현금인출기조차 스쿠터로 30분 이상은 가야 가장 가까운 곳이 나올 것 같았다. 세탁기를 쓰기 위해 다시 스쿠터를 타고 왕복 한 시간을 달리는 것은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먹구름이 잔뜩 긴 하늘에서는 미량이지만 빗방울마저 떨어지고 있었다.
#64
세탁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의 좋은 기분은 있었다. 스쿠터로 도로를 달리는 것과는 다르게 마을 안을 돌아다니는 것에서 작은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탈 것에는 제각기 운용하기 적합한 환경이 있는 것인지 마치 대학교 캠퍼스를 누비는 것과 같이 도로에서와는 다른 괜찮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바퀴를 다 돌아봐야 500M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지만 마치 원래부터 이 동네의 주민이라도 되는 듯 스쿠터를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마을은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관광지인 것처럼 보이지만 리조트라고 단정하기엔 여기저기서 일상의 단서들을 찾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어떤 중년 남성이 세차를 하고 있는 모습 같은 거였다. 결벽증을 지닌 유난스러운 여행객이 일정을 마치고 렌터카를 세차하는 것이 아닌 이상 남자는 입주민일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혹시 유독 내가 머무는 숙소만 주인이 숙박업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 장면 하나만을 증거 삼아 이 마을을 주거단지로 규정하기에는 관광지로 느껴질 요소들이 꽤 있었다. 마을에 들어올 때 가장 먼저 보이는 커다랗고 깔끔한 편의점, 그리고 각 동 1층마다 짠 듯이 자리 잡고 있는 가게들이 그런 요소들이었고 무엇보다 어딘가 급조되어 보이는 마을 분위기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스위스마을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마을은 스위스를 표방하는 듯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원색의 건물들이 그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빨간색과 주황색, 그리고 노란색 등, 각 건물은 마치 금방이라도 물감을 칠한 것처럼 알록달록한 느낌으로 칠해져 있었다. 2018년에 스위스를 포함 여러 유럽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느꼈던 신기한 점도 사실은 그런 점들이었다. 나란히 붙어있는 건물들이 서로 완전히 다른 색으로 칠해져 있는 풍경은 그 말 그대로 이국적인 느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 마을은 무엇인가 그 유럽의 감성을 너무 급하게 따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너무 깔끔하고 밝은 건물의 색감은 세월을 품어 중후한 멋을 보여주는 유럽의 건물들과 괴리가 있었다. 마치 밴드 곡에서 기타만 남기고 드럼과 베이스를 제거한 것처럼 색감에 묵직한 맛이 없어 가벼워 보였다. 게다가 몇몇 건물의 1층 공간은 여전히 공실로 남아있어 허전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런 요소들의 종합은 뭔가 속 빈 강정 같은 느낌을 만들어냈는데 아마도 그 느낌은 영화 트루먼쇼의 주인공 트루먼 버벙크가 느낀 그 감정과 비슷할 것 같았다. 자신의 마을이 사실은 세트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여기저기서 조작의 흔적을 발견한 트루먼처럼 마을 이곳저곳에서 왠지 모를 엉성한 느낌이 전해지고 있었다.
스위스 바젤 시내, 2018년
#65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짝퉁 스위스였다고 할지라도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마을의 분위기만큼은 흡족스럽게 다가왔다. 마을 안에서 스쿠터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은 소음 때문에 그리 맘 편한 일이 아니었지만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도로를 따라 마을 인근의 편의점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뭔가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혹시나 편의점에 현금인출기가 있을까 기대해 봤지만 그 기대는 현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2박 3일 동안 필요할 것 같은 식료품을 구매하고 숙소로 돌아와 미처 하지 못한 짐 정리를 마저 하고 조금 일찍 하루를 마칠 준비를 해나갔다. 적당히 허기를 달래기 위해 전자레인지에 30초를 돌린 파맛이 강한 대파브레드는 치즈가 완전히 녹아서인지 처음 먹었을 때보다 훨씬 더 훌륭한 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