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쯤 결심하고 2시쯤 떠난 제주이야기
사실 비는 내 여행 인생을 꿰뚫는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21살에 경포대에 놀러 갔을 때는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텐트를 쳤었다. 당시 1박 2일 여행으로 시간과 돈 양 쪽으로 궁핍했던 우리는 비가 그치길 기다릴 시간도 숙소를 잡을 돈도 없어서 비가 오던 바람이 불던 마치 야전의 병사가 된 것처럼 텐트를 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이가 없게도 한참이나 내리던 비는 텐트를 완성한 그 순간 거짓말같이 그쳤는데 그 면도날 같이 예리하고 완벽한 타이밍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참된 병신스러움이란 무엇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다. 더 웃긴 사실은 비가 그쳤다는 안도감, 놀 수 있다는 기쁨이 그 어처구니없는 상항에서 꽃피는 병신스러운 감정마저도 이겨버릴 정도로 강했다는 것이었으며 그 때문에 마치 영화 [쇼생크 탈출]의 포스터와 같은 환호성이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굉장히 자연스럽게 터져 나왔다는 사실이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채로 가위가 없어 불판에 구운 삼겹살을 한 줄씩 통째로 씹어 먹던 그 모습이 지금 생각해도 참 병신스럽다.
20대 중반 청평에서는 반대로 탈출의 문제였다. 이 때는 강 옆에 텐트를 치고 캠핑을 즐기고 있었는데 한참을 재밌게 놀다 잠든 새벽, 갑작스레 내리기 시작한 비는 우리를 잠에서 깨게 만들었고 텐트를 세차게 때리던 빗소리는 육감을 통해 공포심으로 전환됐다. 그 공포가 ‘강가 바로 옆에 설치한 텐트가 떠내려갈 수도 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차린 우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2명은 우의를 나머지 2명은 우산을 쓰고 내리는 비와 사투를 펼쳐가며 텐트를 강 바깥쪽으로 옮겨야 만 했다. 여기서 끝이면 다행이었겠지만 다음 날 아침에는 캠핑장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인 다리가 잠겨 몇 시간 동안 고립되는 경험을 해야 했다. 당시 간 밤의 위기를 넘긴 여유 속에 즐기고 있던 아침 식사를 과감히 중단시키면서까지 감행한 탈출 시도는 이미 잠겨버린 다리 앞에서 망연자실해야 하는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는데 강물이 넘실대고 가구가 떠내려가는 강의 위협적인 모습은 나를 온갖 종류의 재난 영화의 위험 상황을 떠올리게 만들기 충분했고, ‘지금 탈출해야 한다’는 직감에 의해 반도 못 먹은 부대찌개를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며 탈출을 제안한 나의 리더십은 결과적으로 탈출도 못하고 밥도 먹지 못한 우스꽝스러운 꼴만 남기고 말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캠핑장은 원래 비가 오면 종종 다리가 잠겨서 물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거였더라. 덕분에 난 아직도 부대찌개를 버린 역적으로 낙인찍혀있다. 너 때문에 부대찌개 못 먹었다고.
헌데 또 비다. 신이 나를 비웃는 건지, 항상 고난을 동반했던 여행의 상징물이 하늘에서부터 또 다른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다행히 빗방울이 그리 굵지 않았지만 덕분에 우중충해지는 날씨는 이제 막 여행을 떠나는 나그네에게 그리 달가울 수는 없었다. 왠지 모를 깨름찍한 느낌. 아마도 소설 속에서 비를 복선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감정으로부터 오는 이 직감을 기초로 두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나 지금만큼은 이 비가 복선이 아닌 액땜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 음산한 기운을 뿌리치기 위해 빗물이 살짝 맺힌 스마트폰 화면을 소매로 닦으며 정류장 바로 앞 가게의 지붕 아래로 몸을 옮겼다. 그러고는 친구들에게 제주로 떠남을 알렸다.
"제주도에 간다. "
“갑자기 웬 제주도?”
“바람 좀 쐬고 오게, 방금 결제하고 집 나왔어.”
“누구랑 가냐, 이번엔 비를 부르지 마라 ”
“혼자 가려고, 벌써 비 온다. 여지없네.”
“네가 있는 곳 어디든 ~ 영원히 비와 ~ ♬”
" ㅋㅋㅋㅋㅋ "
청평에 같이 갔던 고등학교 친구들은 나의 여행 인생이 항상 비로 수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비와이의 노래를 인용해가며 웃어댔다. 진짜 비를 몰고 다니는 것 같다는 둥, 그것이 너의 운명이라는 둥 묘하게 농담과 진실의 경계에 있는 듯한 깨톡 대화를 입에 실소를 머금어가며 나누다 보니 멀리서 공항 가는 버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 끼~이~익! 취이~"
김포공항행 12번 버스. 나 말고는 딱히 탑승자가 보이지 않는 정류장에 정차한 버스는 그 특유의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그 출입구 계단의 모습은 마치 천국으로 가는 계단인 듯, 취소 불가 티켓으로 배수의 진을 친 이 욕구 중심의 여행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나에게 서서히 알리고 있었다.
"삑."
교통카드 찍히는 소리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생각해보니 거의 한 달이 넘도록 사는 동네 밖을 거의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집 근처 친구가 다니는 대학교에서 오전에는 한국사 인증 시험공부를, 오후 4시간은 카페에서 일을 했는데 준비 기간을 너무 짧게 잡은 탓인지, 아니면 내가 요령이 없는 탓인지 주중 주말이 온통 뭔가를 다급히 쫒는 사람의 욕심으로 가득 차 버렸다. 그리고 한 달이 좀 넘어간 시점이 되자 몸과 정신은 더 이상 영혼만으로는 끌고 가기 어려운 상태로 치달았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듯이 그렇게 경험하고 느껴봤으면서도 조급한 것이 곧 헐거운 것이라는 사실을 또 잊어버렸었나 보다. 결국 노력에도 실패한 게 아니라, 노력에 실패하고 말았다.
버스에는 평일 낯 시간답게 사람이 별로 없었다. 덕분에 창가 쪽 적당한 자리를 맘대로 고를 수 있었다. 중간쯤의 자리에 털썩 앉아서는 자연스레 가방을 앞으로 감싸 안고, 창밖을 바라봤다. 버스 노선 주변을 감싸는 낯선 배경들이 창틀을 화면 삼아 휙휙 지나가고 있었다. 목표지점을 설정해 놓고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내 몸을 그저 맡기면 되는 그 상황은 마음속에 여유로운 감정을 조금씩 채워 넣고 있었다.
“터덩 터덩”
과속방지턱 넘는 소리,
“삐~”
승객의 입이 되어 주는 정차 버튼 소리. 참 별 것도 아닌 소리들이 내가 지금 일상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덕에 정신은 마치 환풍기를 돌리듯 환기되고 있었다. 털털거리는 버스가 몸을 흔들고 신선한 광경과 소리들이 감각을 뒤흔드니 굳어있던 생각들이 망치로 얻어맞듯 균열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뇌로 가는 막혀있던 피의 흐름이 다시 흐르는 느낌이었다.
사람은 걷고 움직일 때 생각이 흐른다.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자취방을 잡아 꽤 자주 삼사십 분을 걸어 다니던 그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생각을 만드는 영감은 내 주변으로부터 감각을 통해 얻어지고 그 주변이 뒤섞일 때 물 흐르듯 흘러간다. 마치 몸의 움직임과 사고의 움직임이 동화되는 것처럼 비슷한 박자를 만들어가며 생산되는 것이다. 또한 흘러간다는 말은 생각이라는 것이 순수하게는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내포하며 동시에 단지 나에게 잠시 잔류할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은 적었을 때부터 나의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 휘발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생각은 유료다.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해서 얻어내는 구매품이다. 버스가 만드는 임의적이고 낯선 감각 자료들은 굳어져 존재를 잊고 있었던 그 깨달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있었다. 비가 오고 있다는 사실은 잠시 잊은 채.
생각해보면 왜 여행할 때마다 비가 그렇게 오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도 그것은 비를 부른 다기보다는 비 오는 것을 별로 걱정하지 않는 마음이 만드는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흑 역사를 만드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날씨에 대해 그리 큰 걱정을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폭우가 와도 상관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운명론적 사고를 조금은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지금 가면 과연 스쿠터를 탈 수나 있을지 생각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경우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내면도 있는 것이다. 물론 폭우가 내리지는 않기를 바랐다. 그전에는 친구들과 함께였기에 비를 맞고도 파이팅할 수 있었지만 혼자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간에 가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취 ~~ ”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시간이 한 참 지난 듯했다. 와중에 버스가 정차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렸고,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내렸다. 주위에는 공항사 건물들과 대형 창고들이 보였다. 남자는 아무래도 공항사 직원으로 외부 출장을 다녀오는 길이었던 모양이었다. 정장의 남자 덕에 버스가 거의 공항 근처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사님 김포 공항 아직 인가요?”
‘○○항공’, ‘□□항공’, ‘김포공항’, ‘한국공항공사’, ‘김포공항 국내선’, ‘김포공항 국제선’ 등 공항 근처임을 알리는 느낌이 비슷한 정류장 이름들이 안내방송으로 들려오자 혹시나 공항을 지나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기사님께 물었다.
“좀 더 가야 돼요~”
기사님은 간단명료하게 질문에 대답했다. 다행히 공항을 지나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제 곧 도착하는 듯했다. 안도의 마음으로 제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기사님 바로 옆자리에 앉으니, 그제 서야 김포공항으로 올라가는 기다란 다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김포공항의 모습이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정류장은 김포공항 국내선입니다. 다음은.. ”
정차 버튼을 누르고 백팩의 한쪽 끈만을 어깨에 걸친 채 내리는 문 앞에 손잡이를 잡고 섰다. 버스는 이내 정차했고, 행선지 별로 하차 구역이 나뉘어 있는 김포공항 국내선 입구에 몸을 내렸다.
아직은 비가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