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꼭대기인 폰세바돈에서 다음 도시인 폰페라다로 가는 길은 북한산, 도봉산 등 우리네 산을 하산하는 것처럼 난이도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내리막을 걷는 것이라 전날에 비하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한 평지를 걷는 건 아니기 때문에 26km 정도를 이동하는데 여섯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폰세바돈과 폰페라다. 비슷한 이름의 두 지역이 연달아 있어 처음에는 비슷한 동네인가 했었는데 웬만한 고속도로 휴게소보다 작을 것 같은 마을인 폰세바돈과 달리 폰페라다는 작은 도시에 가까웠다. 나중에확인해 보니 두 동네는 첫 글자의 철자도 달랐다. 폰세바돈은 F(Foncevadón), 폰페라다는 P(Ponferrada)로 시작한다.도착 직전에는 몰리나세카(Molinaseca)라는 초입이 아름다운 마을을 거치기도 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숙소를 미리 예약해 둔 곳이 한 군데 있었는데 그게 바로 폰페라다였다. 단축 코스라고 해도 십 며칠을 매일매일 이동해야 하는데 중간 기착지 하나 정도는 만들어두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초반부터 매일매일 선착순으로 숙소를 찾아다니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전날 폰세바돈에서 알베르게를 찾는 데 애를 먹었기 때문에 이 선택은 굉장히 유효했다. 전날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전날에는 그 도네이션 알베르게에서 폰페라다 다음에 머물 도시인 비야블랑카 델 비에르소의 한 호스텔까지 예약해두기도 했다.
폰페리다에서 예약한 알베르게는 El Templarin이라는 곳이었는데 호스텔에 더 가까웠다. 수용 인원이 많지 않고 주방을 비롯한 전체 공간이 작았지만 전반적으로 시설이 신식이고 깨끗했다. 실내공간이 작아서인지 이 알베르게에는 누구 하나 크게 떠드는 사람이 없어서 머무는 내내 조용한 환경에서 지낼 수 있었고 침대도 깔끔하여 잠을 비롯해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중요한 건 식사였는데 장을 보아다가 해 먹어도, 또 식당에서 사 먹어도 좋을 듯 보였다. 알베르게 바로 옆인 광장 주변에는 가게가 많았고 구글맵으로 검색하면 슈퍼마켓도 굉장히 많았다. 아침에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먹긴 했지만 워낙 이른 시간이었고 알베르게에 도착한 후 가장 급선무는 샤워를 하고 간단한 정비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절차를 빠르게 밟았는데도 벌써 시간은 두 시 반에서 세시가 되고 있어 배가 고파왔다.
고민을 조금 하긴 했지만 처음에는 장을 봐서 밥을 해 먹어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구글 지도에서 알베르게에서 가장 가까운 마트를 다시 확인해 보니 영업 중이 아닌 것으로 나왔다. 다른 대부분의 마트도 영업 중이 아니었는데 알고 보니 일요일어서 영업을 안 하는 것이었다.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반경 안에 못해도 대여섯 개 이상은 마트가 있었는데 모조리 영업종료로 뜨고 있었다. 현재 영업을 하고 있는 마트가 두 개 있었으나 알베르게에서 걸어가려면 모두 20분 정도를 걸어야 했다. 편도면 모를까 왕복으로 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스페인 도착 이후 날은 점차 더워지고 있고 당일 트래킹을 마친 후라 체력도 변변치 못했다. 도무지 그 먼 길을 왔다 갔다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광장 근처에서 적당한 식당을 하나 골라 식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뭐랄까. 광장 주변의 술집이나 식당들은 순례자들이 많이 들르는 바의 느낌이 아니고 관광객이나 이 도시의 사람들이 많이 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야외 테이블 삼삼오오 앉아 시끌벅적하게 각자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 광장을 이리저리 서성이면서 들어갈만한 식당을 탐색했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내가 들어가 식사할 만한 곳을 찾지 못했다. 메뉴의 문제는 아니고. 분위기의 문제랄까. 잠시 가려져 있던 내향인의 성정이 다시금 튀어나왔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는 자기 자신의 재발견. 그렇지. 나는 이 인파를 뚫고 혼자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을 수 있는 DNA를 갖고 있지 않다. 그건 외국이라서 더 특별히 그런 것도 아니다. 그 순간만큼은 폰페라다의 중앙광장이나 을지로 골뱅이 골목이나 별 반 다를 것 없는 곳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시간은 계속 흘러 3시가 넘어가고 많은 식당들은 브레이크 타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식당이나 마트들은 3,4시 전후로 브레이크 타임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나는 선회했다. 그 먼 거리에 있는 마트에 가서 장을 봐오는 쪽으로 말이다.
마트로 가는 길은 제법 험난했다. 지도로는 거리와 시간만이 확인됐던 그 길은 실제로 가보니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 길이었다. 이제 막 당일의 트래킹을 마친 사람의 입장에서 그 언덕은 예상치 못한 또 하나의 작은 고행이었다. 사람들이 가득가득 차 있어 어딜 가도 시끌시끌했던 중앙광장과 달리 교외로 나가는 길은 신기할 정도로 적막하고 고요했다. 마치 섬처럼 느껴지는 그 중앙 광장을 당신은 벗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누군가 말하는 듯했다.
감정에 취해 배고픔을 표현하자면 아사 직전이었다. 이토록 배고픔을 느낀 적이 근래에 있었던가. 허기의 문제를 넘어 그 뙤약볕 덕에 갈증까지 고조되고 있었다. 갈증이 계속 고조되자 그 갈증이 허기를 넘어선다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당장 더욱더 필요한 건 음식이 아니라 물이다. 오아시스를 찾는 심정으로 슈퍼마켓을 향해 갔다.
지도로 확인할 때는 몰랐는데 도착해 보니 그 슈퍼마켓은 마트가 아니라 주유소애 딸린 작은 편의점이었다. 점원은 차도 없이 걸어서 이 외딴곳까지 걸어서 온 동양인을 어떻게 생각할까. 하지만 그럴 고민을 할 겨를은 없었다. 식사용으로 구매할 만한 것은 냉동 피자가 전부여 그 피자 하나와 1.5L 물 하나를 구매하고 편의점을 나왔다. 물건을 담을 비닐봉지를 펼치기 어려워하는 점원에게 나는 마치 여유가 꽤 있는 듯이 한 마디를 던졌다.
" Slow down "
피자가 든 비닐봉지를 한 손에 들고 뚜껑을 딴 생수를 나머지 한 손으로 들고 벌컥벌컥 마셔댔다. 흔한 클리셰처럼 주둥이로 밀어 넣는 생수가 한순간 넘쳐 입 밖으로 튀어나왔고 급하게 들이켜는 물에 사레가 들렸다. 하지만 그 물은 근래 마셔보았던 그 어떤 물보다 내 몸이 이 모든 물을 실시간으로 흡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청량 그 자체였다.
되돌아가는 길은 오던 길 보다 무난하고 경쾌했다. 알베르게의 몹은 주방에 들어가 전자레인지에 냉동 피자를 돌려 늦은 식사를 했다. 혼자서 먹기엔 버거운 양이어 반으로 나누어 반절은 먹고 반절은 알베르게의 냉동실에 보관했다. 전자레인지에서 나온 피자의 맛은 별로 그리 맛있지 않았고 전자레인지를 너무 오래 돌려서 그런 것인지 피자 끝부분 도우는 너무 딱딱해져 바게트를 먹는 것보다 더욱 버겁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