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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객 Jun 01. 2024

나의 언어는 온화한 곳에서만 꽃핀다.

[6일 차] 폰세바돈 -> 폰페라다

스위스 남자 분과의 대화는 그렇게 종료될 줄 알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를 만났다. 정해진 순례길을 걷고 있는 나와 달리 어떤 남자가 같은 방향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한편에서 걷고 있었는데 두 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다시 보니 방금 그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왜 그쪽 길을 걷고 있냐고 물었다. 알고 보니 폰세바돈을 내려가는 순례길은 돌이 많고 진흙이어서 걷기가 힘들다고 말해줬는데 내가 그의 이야기를 다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레온에서부터 산티아고까지 걸어본 적이 있는 그가 나에게 경험을 공유해 줬던 것이다. 이제야 알아들은 나는 그와 함께 한동안 그 찻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몸 컨디션 이야기. 전날의 알베르게 이야기. 스위스의 4가지 언어와 그 4가지 언어로 방송되는 라디오 및 텔레비전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 제네바의 높은 물가에 대한 이야기 등이었다. 그는 본인의 짐을 운송 서비스(하코 트랜스, JacoTrans)에 맡긴 상태였는데 중간에 다른 아시아계 사람들까지 그 걸음에 합류한 이후 걸음이 빠른 내가 서서히 그들로부터 멀어졌다.


그와의 대화는 내 안에 숨어있던 영어를 튀어나오게 만드는 듯했다. 물론 유창한 것이 아니라 짧게 치고받는 정도에 불구했지만 생각해 보면 한국말이나 영어나 다를 바가 없는 듯했다. 나는 상대방에게 들어줄 마음과 여유가 있어 보이지 않으면 우리말임에도 불구하고 그 대화를 잘 이어가지 못한다. 빗장처럼 또 화살처럼 뾰족한 언어들이 사방팔방으로 휘몰아치는 환경은 내 대화의 무대가 아니다. 나의 언어는 조용하고 온화하며 적당한 공란이 있는 여유 속에서만 발현되고 살아 숨 쉰다.


한편으로는 그래서 종이를 좋아하고 글을 좋아하는 것 같다. 스크린이든 액정이든 노트든 흰 백지는 무한하고도 무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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